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많고 높은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의 체계입니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며, 높은 자가 낮은 자 위에 군림합니다. 다스려지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눌림 받고 살지만 그 속에는 자신 또한 힘을 길러서 그 눌림에서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 위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세상에 세상이 추구하는 힘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힘이 등장을 합니다. 그 힘은 세상이 추구하고 바라고 원하는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를 합니다. 이 힘의 주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이 힘의 주인을 따라오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힘의 주인을 거부하고 죽여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원하는 힘을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자 세상은 둘로 나뉘어 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와 주님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힘을 자기의 힘으로 삼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이고, 주님을 거부하는 자는 주님의 힘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자입니다.
종교는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또 다른 힘을 빌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속에서 발생되었습니다. 힘을 통해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신만을 참된 신으로, 진짜 신으로 인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하는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려보고자 열심히 교회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단코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나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교회 성장이 왜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일입니까? 교회 성장은 사람을 힘있게 만들어 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지 교회가 성장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크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입니다. 이 땅에는 예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그 백성을 찾으시는 방식이 세상이 추구하는 힘의 체계와는 전혀 반대의 힘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보기에는 약하고, 천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셔서 그것이 곧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여기에서 세상은 둘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우린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때문에 교회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며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참된 예수님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세상을 살고, 예수라는 같은 이름의 구세주를 믿는다고 해도 한쪽은 이름만 같을 뿐 구세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믿음도 힘의 체계로 이해하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를 만났을 때 자기를 도와줄 힘을 찾는다면 당연히 그 불량배를 물리칠만하고 생각되는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세상의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믿음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그런 힘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7장은 예수님이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고 나머지 9명의 제자는 산 아래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변화산의 주님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서 해같이 빛나는 영광으로 장차 이 땅에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영광으로 오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변화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는 주님의 영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이유는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는 주님의 영광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좋아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은 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4절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자 그것이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음성이 들립니다. 저의 말, 즉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기뻐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영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체험한 세 제자는 구약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예언이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엘리야는 불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입니다. 불을 타고 올라갔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그런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엘리야가 곧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변화산 아래 있던 제자들, 즉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밑에서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이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를 데리고 온 한 사람이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서 아이를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17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세상에서 주의 말만 듣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그것이 곧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가 고분고분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수 없도록 환경을 악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속에서, 몽땅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대 속에서 어떤 것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참된 믿음이고, 어떤 것이 주님의 이름만 이용하는 가짜 믿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악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자'라고 하면서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고, 세상의 힘의 방식을 가지고 믿음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이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서는 단지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이 힘이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 고백이 곧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개가 자신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으니까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은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힘을 위해서 힘을 구하는 패역한 세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고 있는 믿음 아닌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 장차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영광에 나라에 들여보내신다는 것을 아는 자, 그리고 그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그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도 더 큰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있는 믿음은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믿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옮기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믿음을 바라는 것은 패역한 세대에서 함께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믿음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원합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의 믿음을 원합니까, 아니면 사흘만에 다시 사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원합니까? 주님이 세상에서 죽으신 것은 주님의 힘이 세상이 원하는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힘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혹시 오늘에도 여러분은 주님은 거부하지 않는지를 돌아봅시다. 세상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안되는 힘이라고 외면하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가 행세하고 다스리는 곳입니다. 힘없는 자는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의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장차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으면 찾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믿고 땅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자가 큰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