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의식에 참석하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일에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가끔 기도하면서 성경을 보고, 또 성경묵상을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시기에는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십일조 하면서도 멸망에 빠진 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 나왔다는 것이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왔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봉사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모든 것까지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나 자신의 종교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위한 종교열심, 많은 교회는 그것을 주님을 위한 신앙생활로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 바로 그러한 종교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 열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일하고, 나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열심이 있을 때는 만족해 하지만 열심이 없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는 스스로 낙심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믿음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도 되기 때문에 사람은 종교열심이라는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종교열심을 예수님과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교인들에게 강매하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종교열심은 우리를 복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삼켜 버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시 69:9-11절에서 다윗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성전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자기를 삼켰다고 합니다. 또 기도하고 금식하는 열심이 오히려 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우리를 삼킬 뿐입니다(요 2:17). 즉 신자는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이지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교회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집어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전달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부족과 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발견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리고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넘치기 때문에 예배드리게 되는 것이고, 봉사하게 되는 것이고, 헌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종교 열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힘입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종교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이 본문에 등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보면 당시 제자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 누가 높아지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만큼 천국에서 대우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상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열심의 정도에 따라 대우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게는 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세상 방식은 능력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 차별을 두어야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지배하는 땅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천국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행함에 대한 결과에 따라서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죄악된 사고방식이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적 본성을 고발하고 죄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사고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면 안됩니다. 자신의 사고에 맞추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사고와 전혀 맞지 않은 성경을 인간적인 사고에 맞추어서 해석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성경을 고쳐버리고 그로 인해서 예수 아닌 예수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보이고 있는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보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누군가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문제에서만큼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말씀하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태도 때문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천국의 존재여부보다는 천국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이지만 그 모습을 알지 못하면 천국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옥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지옥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한 모습, 즉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고, 높고 낮은 자가 존재하고,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다투고 하는 모습이 곧 이 땅에서의 지옥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의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그 모임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어린아이에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계급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남들과 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천국에 함께 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도 단지 좋아서 할뿐입니다. 뭔가 다른 계산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환경을 가지고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위도 없으며 자신보다 못하다고 남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내세우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천국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자이고, 낮추지 못한 사람은 작은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낮추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올 수도 없는 데 천국에서 자기를 낮춘 사람과 낮추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둘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큰 자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속성이 아니면 결코 천국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종교 열심으로 주님을 만나고자 하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종교 열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게 되는데 천국은 열심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같이 자기 힘을 의지하는 않는 모습,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모습, 이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지는 것이 천국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묻는 것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열심과 힘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가능성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내 힘으로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도 열심히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부모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즉 신자의 모습은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합당한 대우를 받으려고 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반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종교 열심으로 생각하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내 힘과 의지로 예배당을 찾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또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도우셔서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기쁨으로 헌금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진심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의 모임이 천국이고, 그 천국의 모습을 지금 교회가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계급이 없고, 차별이 없고, 행위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모여드는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천국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종교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하고 이 은석교회가 남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나를 삼키는 열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가 나타내야 할 모습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주님의 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게을리하고 있는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린아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거하는 것입니다.
종교열심, 교회에 대한 열심은 여러분을 삼킬 뿐임을 기억하시고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종교열심이 아닌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대한 열심이 여러분을 예배당으로 나오게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모하는 그 마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내 열심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그 힘이 나를 강권해서 예배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를 어린아이 같이 되게 하고 천국에서 큰 자로 여김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