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양(마 18:10-14) - 29강

성경은 맨 처음은 태초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주님의 재림으로 끝납니다. 창조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성경이고, 이 세상의 처음과 나중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는 분명히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 후에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도 지옥의 자리에서 천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려집니다. 천국과 지옥이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 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삼가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 낸 교리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에는 천국은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일단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압축됩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교회 다니는 것은 교회 봉사와 여러 가지 선행을 가지고 증거로 삼습니다. 때문에 신자들도 천국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라는 사람들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하면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외면해 버리려고 합니다. 자신은 이미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믿고 있는데 이미 천국을 확보한 사람으로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특히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목사가 교인들을 협박하기 위한 술수 정도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물론 지옥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서 교회 일에 게으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서 지옥의 이야기를 할 때 신자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든지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좋아하고 지옥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 지옥 간다'라고 하면 당장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구나 신자에게는 지옥 간다는 소리가 크나큰 욕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 가는 것은 싫어하면서 어떻게 하면 지옥 가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불신자들이야 애당초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신자만큼은 불신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는 천국과 지옥을 믿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도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관심 밖이 되어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교회 다닌 것으로 천국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은 어린아이 같지 않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즉 '누가 크냐'를 따지는 그런 사고방식이 곧 천국 갈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크냐'를 따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 본성인데 그것을 지옥의 사고 방식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예수 믿지 않고 죄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나 죄짓는다는 것이 현재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분명히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고, 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죄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봐도 '누가 크냐'라고 서로를 비교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죄다는 것을 알았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이고 죄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는 신자는 분명히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고, 죄를 멀리 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잘라내 버리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또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내 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천국에 방해가 된다면 잘라 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잘라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몸에 대한 관심을 버린다는 것은 신체를 잘라내듯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각오로 오늘 말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나님 나라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잘라내겠다는 그런 결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입니다. 누가 소자를 업신여기게 됩니까? 바로 제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소자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큰 자는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히 자기보다 적게 보이는 사람은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너는 적은 것을 얻지만 나는 큰 것을 얻는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자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이를 말하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도록 강조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지옥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모습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 작은 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봉사가 적은 자, 교회 생활에 부지런하지 않는 자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크고 적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차별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자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자가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해서 그들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에서 복을 얻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소자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는 소자의 모습이 어린아이로 비유되었습니다.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소자로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자가 어떤 모습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자란 잃어버린 양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양은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길을 잃어서 하나님이 다시 찾은 그 양을 더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세상 이치로 생각하면 한 마리보다 아흔 아홉 마리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목자는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보다는 길을 잃어버린 하나를 기쁨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목자는 어떤 숫자를 보거나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양의 능력과 힘을 대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달리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바 되었다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다시금 돌아오게 된 양에게서 보여지는 그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양은 어떤 모습입니까? 도움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음을 절실히 알고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찾는 그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신자의 모습은, 재능이 있어 가지고 봉사를 많이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 신자를 하나님은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할 때는 나의 도움을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함으로서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누가 크냐'고 물었던 제자들의 모습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의 힘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했는가를 따져보고 자기의 것이 더 많아 보일 때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천국 간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 사람은 단지 자신의 믿음과 열심으로 천국에 가게 된 것으로 여기게 될 뿐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천국에 보인다면 그 천국에는 여전히 자기 자랑이 있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지옥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까지 여러분이 힘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요구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돈을 힘으로 여긴 자는 하나님께 돈을 요구하고, 지식을 힘으로 여기는 자는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흔적을 찾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주어진 흔적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감사하는 신자에게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자만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자란 바로 이런 신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자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

사람이 '누가 크냐'를 따지지 않고,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사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자기의 것을 내어놓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기의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흔적만 계속 나타낼 뿐입니다. 자신이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된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흔적을 가진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신자를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면 자연히 업신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을 모르기 때문에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소자를 누가 함께 하는가하면 천사들이 함께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자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귀하기 때문에 그 흔적을 가지고 사는 자를 천사가 지켜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바 된 양이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흔적을 나타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