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마3:1-12) - 3강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신자가 가져야 할 모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이 신자임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지를 못합니다. 신자의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약속만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가장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은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가 되어야지 내가 자신의 의, 즉 신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더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세웠습니다.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전하면서 그 약속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일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뿐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끝난 직분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 역할을 이어 받은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벧전 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에게 주어진 선지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선지자의 모습입니까? 구약에 세움 받았던 여러 선지자들이 나타내었던 모습은 자기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타났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해야 선지자직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일하던 선지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고 하나님만 높였다는 것을 볼 때 오늘날 성령 충만한 모습도 결국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나온다면 그것은 결국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 있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구약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증인이었던 것 같이 오늘날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에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권능이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능은 어떤 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된 나에게서 내가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만 나오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권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때문에 신자나 교회는 무엇을 해도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만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의나 행위가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최초로 선지자의 역학을 하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마 3장에서는 세례요한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은 유대 광야입니다(1절). 유대광야는 요단강 앞에 있는 장소입니다. 요단강 앞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자기들의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3절의 말씀대로 이사야가 미리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모습은 4절을 보면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착용하는 복장이나 음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사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는 이방인의 모습입니다. 즉 세례요한의 이 모습은 나는 너희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생활 모습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선포를 통해서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 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글나 홍해는 건넜으나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자들은 광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지 않았던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것입니다. 홍해나 요단강은 신약적인 의미로는 세례를 뜻함으로 이것은 모두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약 속의 땅은 새롭게 된 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때 그 약 속의 땅에 있는 자들이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광야로 다시금 끌어낸 다음에(즉 애굽에서 나온 것을 연상하면 됨) 세례를 받게 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땅에서 광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약의 출애굽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한 형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나오라는 것이 요한의 외침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영토에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왕이 다스리고 있는 곳에서 탈출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6절에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요한에게 나아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애굽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는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아모스 등의 선지자의 책망의 외침이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것이지 결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의로운 자라고 일컬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회개도 자신들과 상관이 없고 세례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공격한 것입니다. 겉모습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그들의 감추어진 더러운 것을 드러내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더러운 면, 실수, 허물 등 나쁜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잘하고 있는 것만을 보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말씀 앞에서 스스로 감추어 놓은 더러운 면을 내어놓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선지자의 사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0절).

신자들 가운데는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같고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은 하나님이 없고 자신의 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무신론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고 여러 가지 열심도 보이는데 그 삶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발하는 것이 6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열매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나타난 열매는 성령의 열매뿐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맺혀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찍혀서 불에 던지운다는 것입니다. 눅 3:11절에 보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13-14절의 말씀도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결국 열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여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13절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운명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 주는 자의 운명에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의 운명에 들어오신다는 의미로서 세레를 받은 것이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하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죄인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죽으시는 것이 의를 이루시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의로 여기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서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신 것은 성령이 임한 이 분, 즉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줄 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죄인의 운명으로 전환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보시며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까?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있는 쪽을 바라봅시다. 그곳은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던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요한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을 바라보고 광야로 탈출하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의 것 보다는 우리를 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고 그 말씀이 나를 천국 보낸다는 것을 알고 말씀에만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한 신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기존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빠져 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오라고 합니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어려움과 핍박이 있는 길이라도 그것만이 우리가 천국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