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마 19:16-26) - 31강

신자가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문제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세상에 날 때부터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그 본성을 변경할 수 없고, 또는 삭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본성을 자기의 원하는 대로 바꾸거나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결국 인간의 본성에 의한 죽으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모두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발전시키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이웃도 희생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본성에 대해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이 본성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지혜로 통용되지만 천국에서만큼은 결코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이 본성이 있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바꾸거나 없애버릴 수 없는 본성의 문제를, 언제나 내 속 깊이 자리하고 수시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천국에 들어가는 장애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문제 앞에서 우리는 난감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변화시켜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서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자는 발상 또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좋게 만들어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 변화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의 악함과 그 뿌리의 깊음을 절실히 깨닫고 결국 천국은 우리의 힘도 아니며, 우리의 의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깊이 깊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만큼 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두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며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이 변화되어지기 위해서 종교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 없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좇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사셨던 주님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본성적인 삶이고, 무엇이 주님을 좇는 삶인가를 잘아야 합니다. 본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을 좇았으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신앙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19장에서도 자신의 본성을 쫓아 행하였으면서도 스스로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또 하나는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리새인들인데 이들은 예수님께 이혼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즉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말했던 '이혼을 하려면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법을 빌미로 해서 이혼해도 괜찮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법을 빙자해서 너희들 욕심을 채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다른 여자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혼증서라는 법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혼 증서만 써주면 아내와는 얼마든지 이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살면서도 스스로는 말씀은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모든 관심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기 때문에 천국과는 상관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법을 지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하신 비난이었고 오늘 우리들을 향하신 책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 즉 예배나 헌금이나 기도,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법적인 행동이 될 때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앙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부자 청년입니다. 오늘은 이 청년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해서 천국의 성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자기의 영생에 있습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선한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을 자기에게 두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것에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이나 대답사이에서 뭔가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바리새인을 동원시키고 청년을 동원시켜서 그와 같은 질문을 주고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이 청년의 모습이 지금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청년의 이야기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선한 일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무엇을 어떻게 해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 선하시고 나는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선한 일이란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내셨기 때문에 예수님 또 다른 선한 일에 대한 계명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이 선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청년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묻고 예수님께서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 모든 것을 지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청년의 생각에는 계명의 모든 것을 지켰으니까 자신은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법적인 신앙 생활의 함정입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 어떤 기준을 정해서 하다보면 그것을 잘 함으로서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의 생각을 깨버리는 것이 21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네가 계명으로 온전해 지고자 한다면 어디 해봐라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청년은 자신의 계명을 지킨 삶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구제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전 재산을 팔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알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그 손을 잡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따르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법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 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을 이해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청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네 소유를 다 팔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것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모습이 바로 이 자리에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인간의 본성이 천국에 가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소유욕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소유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본성이 천국의 장애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청년과 같이 주님의 요구 앞에서는 근심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두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라면 놀랍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고 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잘못은 선한 일을 자기 스스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년은 열심히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천국에 가는 길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 믿는 것인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천국에 함께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에게 있는 옛 사고방식 그대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사고방식과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서로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항상 내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천국까지도 내가 소유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뭔가 값을 치르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값을 치르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가 많은 자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무소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은 무소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습니다. 소유와 무소유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본성은 우리에게서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악한 본성이고 이것을 가지고서는 주님을 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무소유의 정신이신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싫어하고 예수님의 사고 방식을 좋아하며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안되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인간의 소유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일만이 이길 뿐입니다. 그러나 소유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정신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 안에 소유욕과 싸우면서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심을 믿지 말고, 여러분의 종교 행위를 믿지 마십시오.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 소유욕을 내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린 항상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도, 천국에 가는 조건도 세상의 소유에 있지 않음을 알고 주님만을 좋아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무소유로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