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과 좇음(마 19:27-30) - 32강

신자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에서는 자기의 힘과 소유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구원의 문제까지도 자신이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자기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부르는 하나님이지 자기의 목표와 힘을 버리고 자기의 인생의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부르는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큰 문제냐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명과 연관이 되어있는 문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열심히 부르고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은 왜 선지자들로부터 책망의 소리만 들은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와 힘을 버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앞에서 나의 관심은 버려지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입니다.

지난 시간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의 오해는 자신이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자신을 좇아야 한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좇기 위해서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의 모습도 그 청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심히 놀라면서 "그런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가능한 것인 줄을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심성 속에도 재물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에 대한 잘못을 지적 당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의 선한 일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데 까지는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결코 구원의 조건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을 따를 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 때문에 부자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무소유는 본문에서만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삶이 무소유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영생이 주어지는 상태의 조건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된 상태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천국은 우리에게 버릴 것을 요구합니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무소유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가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 자기의 소유도 전혀 없고, 혈족도 없는 혈혈단신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버림이라는 것, 즉 무소유 개념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남 줘 버리고, 부모 형제도 다 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의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실제로 모든 재산을 버리고 부모 형제까지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 형제를 버려야 주님을 좇을 수 있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옛날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문자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지금은 주님을 좇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흔히 생각하는 대로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까? 그러면 선교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재산과 부모 형제를 버리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는 것을 버림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유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고 관심입니다. 따라서 무소유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다 버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을 사랑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관심이 가 있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이런 의미로 해석할 때, 여러분은 은연중 현재 자신의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부담에서 해방되는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뭔가 숨통이 트인다는 기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곤란합니다. 주님께 더 관심이 가 있고 주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오늘 다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세상의 것이 얼마가 있든 거기에 상관치 않고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사랑합니까?

27절에서 베드로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 뒤에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과 자신을 비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자 청년에 비하면 신앙적으로 우월한 사람인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즉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주님보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왜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버리라는 말 앞에 나와야 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없이 그냥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일이지만 주님은 행동 자체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하느냐'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하여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무엇인가 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의 영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구원을 위해서 뭔가 자기가 할만한 일을 찾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구원에 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자임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찾아다니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뜻이 보여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내 열정, 내 열심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을 기뻐하며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모든 관심에서까지 떠나 서 주님을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으로 영생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뜻 앞에는 나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것까지 자기를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는 모습은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나의 편안함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웃이 나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의 기회를 끊어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다못해 신자의 모임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까지도 이웃의 유익을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유익을 앞세우다 보니까 소홀히 여겨버리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30절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들을 복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제자들같이 외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마지막 때까지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자이고 영생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르고, 지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세상 것보다는 새로운 나라의 주님을 사모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자가 많다는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만이 필요한데 그것까지도 우리의 의지,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