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타신 예수(마 21:1-11) - 34강

고전 16:22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낱낱이 말하고 나서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대한 지식이 충만하고, 수많은 은사들로 충만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면 결국 저주의 도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큰 종이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느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관심이 주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께 더욱 큰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을 주님께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해도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할 때 그 사람은 오직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것으로 최고의 기쁨을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 배우기에만 열심일 때 그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 있는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 목사의 경우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면 결국 그 목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오직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뜻을 옹호해 주는 성경으로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이든 목사이든 성경을 보거나 배우거나 설교를 들을 때는 필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신자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단지 법적인 관계로 참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주님의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시지 우리의 행위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나왔다면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은 당연합니다. 한시간의 시간이 지루할 것이고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빨리 예배가 끝나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하는 말로만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교회 탓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교회가 재미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는 부정하고 싶으시겠지만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해서 이 자리에 나왔느냐?'를 묻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고,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여러분이 많이 들어 왔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는 상식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내용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상식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말씀드릴 때마다 느껴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를 말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감동과 은혜로서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문제를 먼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을 생각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말을 해도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들어가실 때 그냥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고, 거기에 있던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하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내용을 통해서 어떤 감동을 받습니까? 아마 별 감동을 느끼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기록하고 있으니까 '아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구나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을 의미하니까 우리도 예수님같이 겸손해야 하겠구나' 아마 이 정도가 고작일 것입니다.

신자들을 보면서 답답한 것은 어떤 사람이 간증이라는 것을 할 때, 예를 들어서 십일조 해서 복받았다거나, 기도해서 병 나았다거나, 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거나 이런 얘기들을 하면 관심을 두고 들으면서 성경의 이야기를 하면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나에게서 일어난 실제적인 이야기로 보지 않고 단지 책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감동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점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해석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겸손을 말합니다. 물론 5절에서 겸손하여 나귀를 탔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겸손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겸손이 어떤 겸손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겸손을 단지 말을 타야하는데 나귀를 탔다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랜저를 타야 할 것을 티코를 탔다, 우리도 예수님같이 자기를 낮추자는 식으로 겸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러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말을 타야 할 것을 나귀를 타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겸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겸손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을 발견하고 오직 그 사랑으로만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타신 겸손이 어떤 겸손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탔는데 나귀를 그냥 나귀라고 하지 않고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귀를 타신 것은 말을 타고 들어가야 하시는데 겸손해서 나귀를 타셨다는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이 어떤 일인가를 나귀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귀가 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사람이 나귀를 키우는 것은 오직 한가지 용도밖에 없습니다. 짐을 싣는 것입니다. 나귀는 농사용도 아니고, 식용도 아니고, 군사용도 아닙니다. 단지 짐을 나르는 운반용으로 사육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모든 짐을 홀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나귀의 모습을 결합시켜 놓은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의 모든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의 짐을 대신 져줄 때는 그만한 대가가 있을 때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데 남의 짐을 대신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며 주님의 겸손입니다. 이러한 겸손을 누가 보일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짐을 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짐은 죄인이기 때문에 지는 짐입니다. 자기를 성공시키고, 보다 잘 살기 위한 그 욕심이 많은 짐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겸손은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의 인생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면 인생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5절에 선지자가 한 말은 스가랴서 9: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슥 9:9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본문과 비교해 보면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했던 부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하기를 자기 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분, 즉 메시야가 장차 오시는데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들은 이미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받아야 할 구원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야는 자기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메시야로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도 결국은 자기 나라를 해방시키는 영웅을 환영하는 소리이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분으로서 환영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힘의 메시야였습니다. 자기들을 잘 살게 해주고, 적으로부터 보호하며, 원수를 물리쳐주는 그런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슥 9:10절을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힘을 가지고 싸우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약과 다르게 '멍에 메는 짐승'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6절과 7절을 보면 제자들이 자기의 겉옷을 나귀의 위에 얹고 그 위에 예수님이 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짐을 같이 지고 가는 자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 같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주님에게 자기의 모든 죄를 맡기는 그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한 주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돈이 있어야 힘이 나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야 안심이 되고, 사업이 잘 되야 기쁩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서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까?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가신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