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은 나무(마 21:18-22) - 35강

지난 시간에는 나귀타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의 일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나귀는 짐을 지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은 짐을 대신 지는 일임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 나귀 타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신학자들은 만인 구원설이라는 용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는데 그 중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사람만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고,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결단에 달려있게 되어 버립니다.

마태복음 1:21절에서는 분명히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으로 선택되어져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믿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서로 구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해서 한쪽은 멸망으로 한쪽은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때를 가리켜서 마지막 때, 또는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크나큰 기상의 변화나, 어떤 자연의 이변 같은 것을 보면서 종말의 때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의 징조는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의 징조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같이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백성이지, 주님의 길이 고난의 길이고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을 사신 방식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주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분되어지는 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징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거짓 그리스도가 여기 저기서 신자들을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구분되어 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항상 사람들이 소원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유혹합니다.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국 백성이 아닌 자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때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이시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게 된 이유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성에 들어오실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얻고자 무화과 나무를 향하여 가셨는데 열매가 없어서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무가 말라죽고 맙니다. 저주를 받고 말라죽었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21:4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열매 없는 자는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 열매 맺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는 예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가 구분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백성된 조건은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백성과 백성 아닌 자로 구분되어집니다. 그리고 열매있는 자만 구원되고 열매가 없는 자는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자는 저주하신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열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급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일을 더 급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때가 마지막 때가 아니고 종말의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 육신을 위해서 살아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고 계시는 때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에게 예수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지막 때를 믿는자로서 당연한 행동이 아닙니까?

신자는 종말을 믿는다면 그에 따른 행동이 보여지게 마련입니다. 모든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예배당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만 부르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송만 하고 있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종말을 믿고 알고 있는 신자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나타내 보이지 못한 자는 결국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금 무화과 나무의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무화과 나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예수님께 내어 보일 열매가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최대한으로 급한 문제입니다. 하루 세끼 밥먹는 문제가 급한 것이 아니고, 돈버는 것이 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느긋합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찾고 계시고 없으면 저주해 버리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심각해하지 않고 답답해하지도 않고,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만 답답해하고 심각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열매는 전도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열매 운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가지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 그 열매를 종교행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 있는 전도, 열심 있는 봉사, 열심 있는 기도, 이러한 것들이 좋은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가 내편에서 열심만 있으면 된다면 열매가 뭐 그리고 심각한 문제이겠습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다 해결된 문제 아니겠습니까?

열매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너희가 세상을 어떤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입니다. 결국 주님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열매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증거는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고방식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구별해 버립니다.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매란 내쪽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단지 주님의 편에 서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5,16절에서 어린아이의 찬미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전혀 어떤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좋아서 찬양하는 그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이제는 무화과 나무의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무화과 나무가 말라죽는 것이 심판을 말하듯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도 심판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의 때에 저주가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가는 자는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가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세상을 내 편에 서서 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너희는 자연히 세상을 심판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예수님 편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자주 아래 들어갈 자와 구원으로 들어갈 자로 나누어서 보십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세상을 살면서 항상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부러움의 마음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심판이다'는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주님 편에서 사는 자는 자연히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산다면 남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러워서 마음 상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백성된 모습이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통으로 얼룩지고, 수치와 멸시로 얼룩지고, 사람들이 멀리할 수밖에 없는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주님 편에 있는 자의 구별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십자가라는 그 자리가 너무나 편하고 기쁨의 자리가 되는 것이지만, 주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향한 욕망으로 세상을 보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추하고 약하게 보이기 때문에 자연히 회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연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다른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안락을 향한 꿈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은 주님의 편에 서서 살기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럴 때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든, 공부를 하든, 어떤 봉사를 하든 오직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입장에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급한 문제가 무엇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심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열매가 맺어지는 삶을 위해서,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깨닫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를 주께서는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열매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심판 받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