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개(마 21:28-32) - 36강

성경에서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긴장감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대해서 들어야 할 우리들은 긴장감이 아니라 오히려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때에 대한 위기감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원하셨다가 열매가 없어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 사건 역시 마지막 때를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이야기를 과연 긴장감과 위기감을 가지고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느긋한 마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자각하였습니까? 마지막 때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로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멸망 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 이렇게 둘로 구분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면 자동적으로 '자기 백성'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아닌 자는 결코 스스로 자신을 따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삶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되게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상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언제 잘라질 줄 모르는 상태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이 할 수 있는 말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상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을 향한 말입니다. 결국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요한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시각과 동일합니다. 즉 선지자들도 세상을 심판 받을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외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대나 선지자들의 시대나 동일한 것은 그들의 외침을 사람들은 허황된 소리로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세상에서 잘 사는 복이었는데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복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을뿐더러 허황된 말로 일축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성경 그대로 소개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 함께 동참하자고 외칠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 소리를 한낱 허황된 말로만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지자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신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고, 구원은 그 심판 받아야 할 곳에서 떠난 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떠난다는 것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세상문명과 등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관심은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 육신의 문제로 집중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고 자기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치고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자신보다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보다 십자가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허황된 말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도 주님의 십자가에도,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신 그 귀하신 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쉽게 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설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주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왜곡하고 변질시킨 잘못된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진짜 주님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복에 관심을 두고 순종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내세운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십일조하고, 목사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순종해야 복이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이야기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 큰아들은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은 하였는데 끝내 가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싫소이다'라고 거부하였는데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물음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는 처음에는 거부하였다고 할지라도 뉘우치고 일하러 간 둘째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보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선선히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한 큰아들이 명령을 거부한 둘째 아들보다는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한 것은 대답 자체가 아니라 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과가 어떤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열매가 있느냐 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세리나 창기는 무조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를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한 둘째 아들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신들의 삶을 돌이켰을 때 마지막은 세리와 창기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했다'가 아닙니다. 회개했다면 마지막 때까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가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보신 그 시각으로 요한이나 선지자들이 세상을 바라본 그 마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고 마지막 때까지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의의 열매이며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후에는 자신의 삶과 육신의 손해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열매가 보여질 수 있습니다.

열매는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9절에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 말은 우리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러한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열매를 맺으라는 명령으로 알고 자신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해서 착해지고 의로워지고 진실해질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신 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회개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편에서 세상을 살아갈 때 빛의 열매는 자연적으로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면서도 모든 관심은 자신의 육신의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육신에 대한 책임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나에 대한 문제를 내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아무리 믿음을 말해봐야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 머리 속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자리잡고 있고, 세상을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자리잡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요한의 외침이나, 선지자의 외침이 들려온들 그 외침이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요한의 입장에, 선지자의 입장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통해서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불에 던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심판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박국 3:2절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흔히 교회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이 기도를 자신의 교회를 부흥케 해달라는 표어나 기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수년 내에 자기들의 죄를 심판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 속에 긍휼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것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들이 열매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 편에서 살아갈 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세상보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사모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 자신의 육신에 더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단지 말로만 들려지지 않고 요한의 외침으로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열매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