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농부(마 21:33-41) - 37강

소위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라는 문제를 자신이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가르침에 반발을 안하고 인정을 하면 그것으로 십자가를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구원' 그 자체의 귀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 때에도 '쉽게 번 돈은 쉽게 써버린다'들 합니다. 즉 고생을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번 사람은 자신의 땀과 노력의 대가에 대한 값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귀함도 모른 채 단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려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면 구원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고 남은 것은 축복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가치를 두고 살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느낌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안믿으면 교인이 아니니까 믿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또 사실 교회에서 교인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도 한 영혼이 진실로 천국에 가느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해 버리고 그 믿음의 증거로서 교회에 대한 열심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자라온 교인들이 과연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십자가로 여겨지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십자가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단지 바라만 보고 있는 방관자이지 참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길에 대한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를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결코 말한마디로 해결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함께 하셔야 가능한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굳이 어렵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에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쉽게 생각하는 것은 고난을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왜 청년들이 군대에 가기를 꺼려합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단지 26 개월 동안 집을 떠나 있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군대에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힘든 훈련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군대에서 훈련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군대를 결코 어려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군대를 제대한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자랑하는 것은 어려운 훈련을 겪은 얘기들입니다. 그럴 때 전혀 훈련도 받지 않고 힘들지 않은 곳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지냈던 것이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누가 십자가 지기를 꺼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이지만 우리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가져다주는 십자가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눈물 몇 방울 흘려주고, 헌금하면 그것으로 십자가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기를 따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그런데도 우리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제외하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빙자해서 어떤 혜택을 받기를 원하는 불의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고 불신앙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믿음이라고 우긴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믿음 아닌 믿음을 붙잡고 스스로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아닌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실제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신자를 통해서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 반응은 진짜 십자가를 보여주는 신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을 쉽게 수긍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포기 못했기 때문이거나, 자존심 때문이거나, 자기의 고집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자신의 잘못을 수긍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잘못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가 나타날 때 자기의 잘못을 지적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자가 받는 고난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조롱 당하고, 진짜가 오히려 가짜 취급받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편에 서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 편에 서기를 소원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면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포도가 맺힐 때가 되자 주인은 실과를 받기 위해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또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 그 농부들이 아들은 공경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그 포도원을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40절).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나쁜 일을 보면 분개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도, 예수님이 악한 자들의 손에 죽으셨다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손에 죽으셨다는 것은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쉽게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악한 농부'들이라고 분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악한 농부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찌른 자가 바로 자신임을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교회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하는 것이지 나는 철저하게 주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주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어떤 말에서도 자신의 죄를 지적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옹호해주고 자기의 적을 책망하는 말로만 듣기 때문에 회개는 없고, 교만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과를 원해서 왔으면 실과를 주면 되는데 왜 그들을 죽였습니까? 그것은 실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 놀았기 때문에 주인에게 줄 실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 나머지 종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에게 포도원을 주겠다는 것이 주인의 의도인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45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고, 구제도 했으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았고, 제사도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이만하면 그들은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매로 여기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열매가 많은데 예수님 보시기에는 열매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리새인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들이 한 행위는 무조건 잘못이고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바리새인을 보면 바리새인이 곧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종교인들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의 열심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종교생활이 그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것을 열매로 여기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책망이고 심판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시 유대인들과 비슷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열매가 없다는 책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책망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어지는 쪽으로 삶을 고쳐나가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열매를 자기들의 열심에 의해서 발생된 결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들이 열심히 한 만큼은 열매가 맺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설교를 한 목사는 설교에 대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고 열심히 신앙 생활할 때 그것을 열매로 생각하고 마음 뿌듯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열매입니다.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이 자기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설득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맺어놓은 열매라고 생각하고 마음 흐뭇해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생각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열매는 열매로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시게 된 여러 가지 원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충돌을 일으키신 것은 율법 문제, 표적 문제, 이혼 문제, 성전 문제, 부활문제 등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종교 형식을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공격하셨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잘못됨을 공격하셨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엉터리 믿음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는 말씀을 하심으로 그들의 종교적 지위에 대한 자존심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주일성수 등 여러 가지 법적인 것을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거룩성을 두며 예배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시하던 것과 뭐가 다르며,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집인 거룩한 성전에서 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사람이고 때문에 지도자로서 대우받고 섬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오늘날 목사들이 거룩한 교회에서 평생을 봉사하는 자기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지도자이고 신자들은 그 지도자를 섬겨야 하고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틀린 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외에도 지금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유대인의 종교적인 모습을 따라가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인이 농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농부가 주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농부들의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할뿐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내세운 종교적이 행위는 열매가 되지 못하고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가 따로 있기 때문에 종과 아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칫 농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열매를 내놓으면서 열매라고 우기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여자는 자신의 죄를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 때에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한 오만과 자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오만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만듭니다. 스스로 의인된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인된 자에게는 십자가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예배당 세우고, 자기들이 전도해서 교인 채우고, 자기들의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칭찬 받으려는 헛된 야망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이런 야망 자체가 불신앙임을 알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올 자격도 없는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어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산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보다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다시금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그것이 곧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열매이며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