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돌(마 21:42-46) - 38강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생명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전부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고서라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요즘 신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참으로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앎과 삶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앎과 삶이 일치가 되지 못하고 앎은 앎으로 끝나버리고, 삶은 앎과는 별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믿음과 생활이 일치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앎이 아닙니다. 삶이 없는 앎은 단지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식이란 생명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이란 앎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앎에 인해서 삶이 다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앎과 삶의 일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야고보 사도와 바울 사도가 서로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이란 자기의 힘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자기의 모든 힘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야고보 사도는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야고보서에서 강조되는 행함이라는 것도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이 전도하고, 성경 읽고, 구제하는 식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앎과 삶의 일치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과 인간이 단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로서 나타내는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앎이 제대로 되지 못한 삶은 스스로를 착각으로 몰아갑니다. 즉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바라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죄인인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이 선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선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죄라는 것을 상상치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었다고 할 때 그 행위를 모든 사람들은 선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선한 행위로 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을 도와주는 행위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제가 뭐냐는 것을 알고 하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남을 도와주었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것을 선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선의 기준은 미가서 6:8,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고 말합니다. 그 앞서 6절, 7절을 보면 하나님은 경배도 제물도 우리 몸의 열매, 즉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위들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시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 완전한 지혜라고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또는 교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구제를 하고서도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사탄이 세상에 강도가 많게 하고, 사기꾼이 많게 하고, 도둑이 많게 하고, 도덕과 윤리를 떨어뜨려서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결과일 뿐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탄이 세상을 몽땅 자기를 중심으로 살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한 행위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까 한 예로서 말한 구제가 죄가 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남을 도왔을 때 그 행위는 나의 도덕과 윤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 아래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은 자신의 보람으로 삼고, 그 일을 통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힘으로 한 행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이러한 말을 세상의 기준이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라고 해서 하나의 괴변으로 여겨버리면 여러분은 점점 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결과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린 앎과 삶의 일치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그 기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그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한가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사탄의 권능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올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탄을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성경에 경배도 제물도 선한 것이 아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 헌금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는 말을 하면 그 말에 분개를 하고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온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탄의 권능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우리 왕이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를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난 시간에 주인이 포도원을 열매를 바칠 만한 자에게 준다는 얘기를 했는데, 열매라는 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맺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42절에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짓고자 하십니다. 집을 지을 때는 돌이 필요합니다. 돌을 쌓아서 집을 지어가야 하기 때문에 좋은 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쌓아져 가는 돌이 되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나님 집을 쌓아 가는 돌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탄의 권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사탄의 권능 아래 사탄의 종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집의 돌의 역할을 하려고 설치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 가려지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앎이 없기 때문에 사탄의 종으로 움직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움직이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세워지는 돌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의 권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탄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개입된 것이 외부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탄을 이기는 외부의 능력이 우리에게 개입되어서 우리를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자신을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으로 종으로 바꾸어 놓은 그 외부의 능력만을 바라보아야 마땅합니다. 나를 영생으로 바꾸어 놓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만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앎과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아무리 떠든다고 해도 그 행하는 것이 사탄의 모습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머릿돌이라는 것은 기초를 말합니다. 집이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머릿돌 위에 모든 것이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기둥, 벽, 지붕이 머릿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가 머릿돌이라는 것은 주가 우리의 기초가 된다는 듯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세움 받을 존재는 누구인가? 주께서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된 것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곧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세움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머릿돌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돌이냐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주가 많습니다. 너도나도 주를 말합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주를 말하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합니다. 아니 버림받은 주를 말하기는 해도 우리가 그 위에 세움 받기 위해서 나 또한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까? 세상의 상식과 법칙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사탄의 종으로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죄인된 인간으로서는 극히 당연한 삶의 법칙과 상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집에 쓰이는 돌은 어떤 돌이어야 합니까?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상식을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개입되는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고집을 벗어버리고 부서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초가 되시는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버림받은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을 알고, 주를 바라보는 자가 되었는데 왜 또 다시 사탄의 말에 순종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으로 나의 고집이 깨어진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소망으로 삼지 않고 주님만을 소망으로 살고 싶어하고, 주님의 십자가가 곧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듯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종된 모습이고,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알고 주께 감사하면서 주님께 나오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압니다. 자신이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입혀졌기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서 버림받는 자신을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능력을 입은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고 항상 주님의 힘으로 은혜 안에서 살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탄의 종은 제 아무리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45,46절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공격한다고 느껴질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와 전혀 다른 말을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의 종교의 자리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예수 아닌 예수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나의 종교를 포기하고 머릿돌이신 주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종의 모습인가를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머릿돌로 하여 하나님의 집에 세움 받은 돌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