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것인가?(마 22:15-22) - 40강

신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는 수많은 교회들이나 여러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서 운동화되고 강조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자는 말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는 식으로, 또는 다른 종교는 할 수 없고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시작된 악은 세상이 멸망당하고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을 다하고, 힘을 합한다고 해도 이미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또는 한국교회의 신자가 천만이 넘는데(얼마전 신문에는 약 8,800,000으로 발표) 천만인 신자가 신자답게 산다면 세상은 변화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세상이 이렇게 악해가고 범죄가 늘어가는 것은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나 신자의 할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인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도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까? 그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아야 할 세상의 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지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속에서 구원받을 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셨던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도덕, 윤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정신 그대로만 살면 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신자의 모습은 개인의 의지와 열심, 또는 인격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는 신자가 주님의 뜻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야 세상에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대로 살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 나온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것은 '내뜻'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가 원하고 소망하는 삶의 모습이나 방향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천국은 소망한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과는 상관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고, 또 무엇이 악한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하셨던 일들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신자가 아무 어려움도 받지 않고, 반대도 받지 않고 신앙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신자는 꼭 어려움이 있어야 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야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갔다면 분명히 닥쳐야 할 일들이 주님의 길을 피해버렸기 때문에 겪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세라는 것을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나 혼자 거부한다면 그 집단으로부터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신 길은 대세를 거부한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상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거부하신 것이 주님의 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쓸모 없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면 먹을 것 걱정 없고, 병도 걱정 없는 그야말로 자기의 소망을 이뤄주는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전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욕심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이유를 더 이상 찾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세상을 원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집안에 문제없이, 문제가 있더라도 쉽게 해결되고, 언제나 평안하게 세상을 살다가 천국도 가는 그런 인생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세 속에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으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문병을 갔다고 합시다.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얘기를 하면서 예수님만 믿고 기도하면 낳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부터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항상 궁금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얼버무리고 지나가 버릴 것이 아닙니까? 만약 예수님이 그 환자에게 찾아가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당연히 고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마태복음 8:16,17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는 이사야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 환자를 향해서 말씀하신다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이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고자 힘써라'는 의미의 말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즉 살아도 은혜요 죽어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죽음을 앞에 둔 환자에게 가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서 듣는 사람이 기분나빠하고 화를 내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 그런 말을 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오직 죄를 알리고 천국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반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같이 한다면 결국 세상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을 일이 수없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세금을 로마에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이 세를 바치라고 하신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힘 앞에는 별수 없구나'라는 구실로 시비를 걸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에 신고해서 잡아죽일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치라고 한다면 기독교가 무너지게 되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목숨이 위태롭게 되도록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만들어 놓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바리새인들의 말의 올무를 피했습니까? 19-21을 보면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 들고 나온 것은 세금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관심이 세상의 문제에 있지만 나는 세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인간의 관심이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대학 입시를 볼 때 '하나님 어느 대학을 시험쳐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 관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느 대학에 들어가든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신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설령 대학에 떨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관심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소유입니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권력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은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만 관심두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세상사람의 수준에 있으면서 말로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살든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아무리 변화되어서 좋은 환경이 된다고 해도 환경으로 인해서 인간이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이 언제나 좋은 환경이기를 기대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욕하든 칭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하신 말씀만을 전하며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든, 쫓겨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느냐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갈 때 나머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결과요, 쫓겨나는 것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항상 좋은 환경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날마다 내가 처한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올무에 매이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것인가를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세상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일은 하나님의 책임으로 알고 오로지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만 관심두고 살뿐입니다. 이것은 욕먹는다고 해서 그만 둘 일이 아니요, 쫓겨난다고 해서 타협해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