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하나님(마 22:23-33) - 41강

설교란 사람을 바르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신자를 자기가 원하는 어떤 신자상으로 만들어 가려는 의도가 있을 때 그 설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말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란 사람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관심을 두고 계시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그대로 전할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연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이 자리에 나왔는지 아니면 주일행사로서 나왔는지는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설교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듣기 싫은 소리로만 들려질 뿐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설교가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만약 여러분들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면 나중에는 자신이 변화되지 못하고 신자답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모든 원인은 설교로 돌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여러분을 향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나 자신을 향한 설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전함으로서 내가 누구에게 붙들려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시고 설교를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 자들을 교회로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게 하심으로 자신 스스로가 누구에 붙들린 삶을 살고 있는 가를 확인하게 함으로써 구원으로 자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신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갈 뿐, 자신의 삶을 내세우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낱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세금 문제를 들고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사람들의 문제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사실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고 안바치고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세금 문제에 대해서 민감한 분도 있습니다. 세금을 국가에서 내라고 하는 대로 내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법이 허용하는 내에서 최대한으로 피하는 것이 옳으냐, 어떤 것이 신자다운 것이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세금을 국가가 내라는 대로 정당하게 바쳤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세금을 덜 냈다고 해서 신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어느 것이 신자의 양심에 바른 것이냐라고 묻기도 하지만 신자의 양심이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세상과의 관계를 가지고 따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사느냐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신자되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이냐?'를 묻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신자다운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나는 신자'라는 만족감과 위로감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새로운 율법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고 소위 큐티라고 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적용이라는 것이 자신을 법적인 삶에 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고 있을 때 자연적으로 보여지는 열매일 뿐입니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문제는 땅의 문제일 뿐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세금을 포탈하든 말든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게 유지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서 살고자하는 사람이 세금 포탈까지 하면서 돈을 모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이 문제가 끝난 후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다같이 자기들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이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또한 그들에게는 잘못된 말씀으로 들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성경을 각기 자기들의 전통과 지식에 의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위배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도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난처하게 하고자 했던 질문은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하면 틀림없이 곤란해질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세상적인 이치로만 생각하려고 하는 그들의 잘못을 되려 책망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질문한 부활의 문제는 이러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맏이가 죽자 둘째가 형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도 죽고 셋째가 형수와 결혼하고 다시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형제가 다같이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다 죽었는데 나중에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의 남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사두개인과 같이 세상적인 이치를 가지고 부활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에 참으로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장례식을 치를 때 위로한다면서 하는 말은 나중에 부활해서 다시 만난다는 것입니다. 죽은 남편, 죽은 아내, 죽은 부모도 부활하면 만날테니까 슬퍼하지 말고 기쁨으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오해인가 하면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세상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 있는 일들,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곳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았고, 또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천국에서 상이 남들보다는 크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세상 관계도 세상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고 허무한 것이냐는 생각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죽은 사람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소생일 뿐입니다. 나사로가 그렇고 회당장의 달 야이로가 그렇습니다. 부활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인데 이들은 또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능력을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오해하고, 그러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분명히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은 무엇이고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2절을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은 산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죽어서 이미 흙으로 돌아간 예전의 사람들을, 아직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고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산자로 지칭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결국 살았다, 죽었다라는 것은 육체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죽었다'라는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죄악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지 않았다고 산자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인으로 이 땅에 온 자는 모두 죽은 자입니다. 때문에 저나 여러분은 모두 죽은 자입니다. 사람이 죄악 속에서 죽은 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죄의 열매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하나님을 불러도 자기를 이롭게 해줄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남과 비교하고 자랑하는 이러한 모든 모습들이 자기 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죽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 있던 자를 생명으로 옮기시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깨달을 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처음에는 죄속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힘으로 약속을 이루어 보고자 한 아브라함이나, 장자가 어떤 자인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장자를 지목한 이삭이나.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 여기고 남을 속이고 술수를 부렸던 야곱이나 모두가 죽은 자, 죄인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약속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산 자가 되었을 때 그 모습은 더 이상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오해할 때 자신은 이미 죽은 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장차 부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다같이 죽은 자로서 왔습니다. 다같은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좀 나은 죄인이 있고, 더 악한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죽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아는 자입니다.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자만이 자기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자는 하나님이 살리신 은혜 또한 무시해 버리고 항상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자로서 하나님이 살리신 권능을 입은 자는 언제나 자기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는 자기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산자이고,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부활한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한 자로서 살기 때문에 세상에 권력과 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지 않습니다. 이미 산 자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를 위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도 현재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죽은 자로서 살아갑니까? 모두가 죄인이고 다같은 흙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이웃을 그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산 자입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 편에서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산자는 세상을 죽은 자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