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마 22:23-33) - 42강

지난 주일에는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현재의 세계와 내세 즉, 부활후의 세계를 구분 지어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삶과 내세라는 것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세라는 것은 현재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가는 좋은 곳이다'라는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현재대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면서 재미있게 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의 모습이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살 것인데 그 부활을 믿는다면 죽는 것을 겁을 내겠습니까? 부활을 믿는자가 세상의 권세와 힘이 두려워서 믿음을 고집하지 못하고 타협과 양보의 길로 가겠습니까?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이미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포기한 자에게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세계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요구하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능력과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자기 인생의 책임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의 성공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는 산 자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압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이며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두개인들이 대답을 못했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또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가 말한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총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사는 '당신이 구약의 율법을 다 알 수 있느냐'라는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평생을 율법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율법을 제일 잘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안다는 것이 그들을 신자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된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암기를 잘한다고 해서 성경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암기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몇 번 읽었고 어디를 암기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성경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율법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암기한다고 해도(암기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것 때문에 천국 가는 것도 아니요, 암기하는 성경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읽기 운동을 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도록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실적 위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인간들의 종교행사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법을 지킨다는 차원에서의 말이 아닙니다. 즉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 신자답게 되거나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이미 신자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성경을 100번을 읽고 암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사는 율법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율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은 마음만으로도 안되고, 목숨만으로도 안되고, 뜻만으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행함이 있어야 하며, 사랑 없는 행함 또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행함은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함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목적하고(자기 자랑을 위해서든, 천국을 가기 위해서든)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 율법사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첫째 둘째는 사랑의 우선 순위를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이 크고 그 다음으로 이웃사랑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39절에 보면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그와 같다는 것은 첫째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같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우선 순위가 없습니다. 누구를 먼저 사랑하고 누구는 그 다음에 사랑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마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오셨는데 완성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구약 율법을 이룬 자입니다. 구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 사상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율법들은 사랑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면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자기의 욕심도 버리고, 자기의 뜻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 마음에 담고 그대로 살아가기를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요구를 말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 뜻을 포기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는 결코 내 요구를 하나님께 내세울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자기의 뜻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봉사를 해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봉사한다'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봉사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려야 합니다. 단지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냐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입니다. 이외에 모든 것을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행동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먼저 내 몸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 자기 몸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아는 자가 그 사랑을 다시 내어놓는 것인데 그 대상이 이웃입니다. 그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 사랑은 나에게 있는 사랑으로 이웃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이 하는 이웃 사랑이란 그 대상이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의 이웃 사랑입니까? 하나님 사랑은 구원 사건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자기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구원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러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한 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났다'라는 것을 깊이 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할 것이고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만이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냥 사랑하라고 하면 부담이 덜 되겠는데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만큼 이웃에게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해서 만원을 썼다면 이웃을 위해서도 만원을 써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똑같이 유월절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사람들이고, 똑같이 홍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즉 어린양의 피로 출발한 공동운명체이고,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건짐 받은 경험이 있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죽음에서 살아났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경험을 가진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면 내 이웃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저 이웃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는 이웃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껏 해봐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때문에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이라면 저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나나 저 사람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살아난 몸이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몸이 아니고 같은

몸입니다. 차별이 없고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사회적인 위치나 소유를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며 같은 운명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운명이 아닐 때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른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랑을 모른다면 그들은 같은 운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같은 운명이란 서로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길을 간다면 같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아는 자는 오직 주님의 피만을 드러내며 예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이고, 자기의 열심이고, 몽땅 자기 것만 드러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같은 운명의 공동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공동체라는 것은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한 일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들 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같은 조직에 속해있으니까 싸우지 말고 서로 잘 지내자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공동체란 같이 밥먹고, 같이 일하고, 재산도 공동으로 하고, 수입도 공동으로 해서 나눠 가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공동체는 같은 운명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운명입니다. 세상의 조직체를 떠나서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은혜만을 자랑하고 사는 자라면 그 사람이 이웃이고 같은 운명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곧 교회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열심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대화도 하지 말고 멀리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는 미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난 것을 기억하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로 가르쳐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이웃의 관계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뿐이지 불러들이는 일은 성령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을 죄인의 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진심으로 안다면 모든 사람을 나와 똑같은 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일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운명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같은 운명에 있는 자로서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기까지 힘을 잃지 말고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열심히 살자고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할 관계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들은 서로 권면해주고, 격려해주고,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은석교회 여러분들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가 기도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교회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동정하는 것이지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려움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면서 도와주고 기도해줄 것입니다. 단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굳건히 사랑 안에 서 있기를 말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을 받았은즉 사랑하며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