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주(마 22:41-46) - 43강

지난 주일에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사랑이란 우리가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즉 이웃에게 정답게 대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힘을 다해서 도와주는 인간의 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을 원합니다. 남이 나에게 정답게 대하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내뱉는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이 한 주간만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아도 목사가, 장로가, 같은 구역의 집사가 전화해주기를 원하고, 만약 전화를 하지 않으면 '성도가 교회를 빠졌는데도 왜 관심이 없느냐'는 불평을 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고,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교회로 옮겨보기도 합니다. 즉 '사랑 찾아 삼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속성을 잘아는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베풀며 '우리 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다'는 것을 내세우며 교회에 정을 붙이도록 하기 위하여 성도끼리 관심을 가져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많은 교회, 친절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라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는 친절한 교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말씀한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친절한 교회를 원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일에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같은 운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아났을 때 거기에 함께 했던 자들은 모두 같은 운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인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그 대상이 같은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몸인 것을 알 때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이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운명에서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지는 자를 권고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운명으로 붙잡아 놓으려고 하는 그 간절함이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관심이란 친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에 같이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여질 뿐이지 결과는 우리의 주권이 아닌 것입니다. 결과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천사 같은 말로서 상대방을 가르치고 설득한다고 해도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한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성경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도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어떤 유명한 신학교로 유학을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십 년간 성경을 연구한다고 해서 발견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식의 차이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말은 맞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맞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습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며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입니다. 이 땅에는 성령이 함께 하는 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한 자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성경을 통해서 증거되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이고 십자가에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서는 비록 십자가가 외쳐지고 있지만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것으로 끝났고 이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일만 남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예수입니다. 이 예수는 결코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믿는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다른 예수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과연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됨의 증거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면 그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삶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진짜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예수를 섬기고 있는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다'라고 미리 결론 내리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날마다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기다리긴 하였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자기들 눈앞에 있는 예수라고는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해도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출신성분이나 모습이 전혀 그들이 상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구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만 믿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왕이었으니까 분명히 그리스도도 왕과 같은 힘과 영광을 소유한 모습으로 와서 자기들을 로마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실 때 인간의 정상적인 생각과 이해로서는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지도 않았을 때 다윗이 자신의 후손으로 올 그리스도를 '주(창조주)'라고 칭하였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다윗은 아직 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주'라고 칭하고 있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고 있는 묘한 관계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답변을 못했습니다. 답변을 못한 것은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가 진짜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답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아직 오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주'라고 칭하였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인간의 혈통에 보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으신 예수님이냐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명확히 구분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혈통에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44절을 보면 "주께서(하나님) 내(다윗) 주께(그리스도) 이르시되 내가(하나님) 네(그리스도) 원수를 네(그리스도) 발아래 둘 때까지 내(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원수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창 3:15을 보면 원수가 등장을 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의 관계인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자의 후손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다윗을 보면 다윗의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원수도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이 죄의 세력을 이기시는 분이 바로 진정한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현재 자기의 원수로 자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이길 것을 미리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메시야는 원수된 죄의 세력, 즉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인간의 혈통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고 바라보는 자는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죄의 세력인 죽음을 이기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참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믿고 나오는 자는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알게 되고 그분을 만났다는 것,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가 않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그토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기쁨을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거나, 사업이 잘 된다거나, 교회가 성장한다는 기쁨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사 교회에 나와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기쁨을 원하고 나올 수는 있습니다. 즉 종교생활을 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나 평안을 의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하는 것은 교회의 좋은 분위기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인들이 서로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사이좋게 지냄으로 교회에 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교회를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적인 것이지 결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가운데 산다면 그런 분위기의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의도하거나 기대한다면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모습의 교회를 의도할 때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 방식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죽음이 겁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즐거움이 창출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분위기의 교회든 그 분위기가 나의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기쁨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주님께 매이지 교회에 매인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자신은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무슨 직책을 맡았다가 그 직책에도 밀려나도 상관없이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진짜 신자이고 그리스도를 만난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원수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이 살고자하는 욕망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원하는 내가 곧 나의 원수입니다. 이 죄의 세력을 그리스도가 승리하셨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주님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면, 그리고 그 힘으로 산다면 이제 세상에 대한 욕심은 버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세상의 욕심을 조장하고, 세상적인 기쁨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공받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을 어찌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내 기쁨이지 주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내 기쁨이지 주님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 기쁨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만약 세상 사람처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기쁨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과연 내 안에 참된 그리스도가 계시는지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가 존재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세상 즐거움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것들이 점차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진짜 주를 만난 기쁨과 즐거움을 보여줄 수 있는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