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음(마 23:1-12) - 44강

사람들은 지위라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위는 높으면 높을수록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능력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높은 지위에 앉는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과 재능이 있어서 사용가치가 높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위를 높여서 그 사람의 능력과 재능의 영향력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위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줍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지위가 높다는 것은 부와 능력을 동시에 나타내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바라고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아지면 그에 대한 대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에 도전을 하는 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지위가 낮은 자는 높은 자 앞에서 굴복을 해야 하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군림을 원하지 굴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림하는 쾌감 때문에라도 높은 지위를 항상 꿈꾸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단체라는 것은 국가로부터 시작합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단체 안에 여러 크고 작은 단체가 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서라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서를 책임질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장이라는 지위를 주게 되고 그 부서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 복종하여 그 조직의 활동을 통해서 그 단체가 더욱 탄탄해져 가는 것이 조직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 어떤 하고자 하는 일은 체계 있고 질서 있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이런 단체와 조직 속에서 움직여져야 합니다. 명령체계속에서 위계질서를 지켜나가면 모든 일이 난잡해지지 않고 효율성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급사회입니다. 세상은 이런 계급사회로 존재해야 제대로 되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료제도 속에서 계급사회를 유지해야 발전과 성장에 효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세상의 사회제도이지 절대로 교회의 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급사회가 교회로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의 관료제도, 즉 계급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세상적인 제도가 스며들게 된 것은 교회의 목적을 세상과 똑같은 발전과 성장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과 발전에 기술은 성경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제도가 필연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단체를 만들면 꼭 발생하는 것이 단체를 성장시키고 싶은 욕망입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됨으로 말미암아 그 단체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그 단체 안에 수많은 조직을 만들게 되고 그 조직이 활발히 움직이고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위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조직의 장으로 앉혀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기에는 계급이 존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급은 철저하게 명령과 복종입니다. 명령과 복종이 없는 계급은 없습니다. 결국 교회가 종교단체로 전락되고, 그 단체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교회를 세상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이름하는 종교단체일 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단체가 아닙니다. 단체는 단체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단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단체가 될 때 신자는 교회라는 단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해야 하는 의무감에 빠져버립니다.

교회가 신자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신자가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자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느냐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성장하고 부흥해야 한다는 욕구도 필요 없습니다. 지위도 필요 없고 조직도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조직을 만든다면, 그 조직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일의 분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 조직도 결코 계급으로 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상전이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지도자라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되고 지위가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세상 모습일 뿐입니다. 교회에 지위가 있으면 안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차별이 없다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로 모이는 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로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까지도 함께 포함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는 다시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앞세우지 않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세상의 부와 명예가 자랑될 수가 없고, 또 다같이 죽은 자라는 처지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났을 뿐인데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도 없고, 열심을 내세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만 얘기하면 됩니다. 십자가를 아는 자들이 모여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발견한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 외에 또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신자가 교회에 대한 부흥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모이게 될 때 이미 그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로서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단체로 모이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는 교회를 형제라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선생도, 아비도, 지도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선생은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아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지도자도 예수님만이 지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생과 지도자라는 것을 이 땅의 누군가에게 이양하신 적이 없습니다. 즉 예수님 대신 선생으로, 지도자로 부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목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선생으로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그 말을 성경 어디에 근거해서 하는 말입니까? 성경을 가르친다고 선생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깨달은 성경이 자기의 능력입니까? 자신의 실력입니까? 사람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선생이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자는 단지 다른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성령이 깨닫게 하신 바를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하나님께 쓰여지는 일의 분담이지 성경을 가르치기 때문에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고, 특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지도자도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 삽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말씀을 따라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은 목사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단지 그 말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가 지도자의 위치에 군림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성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같이 죽은자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도를 위하여 피 흘리신 분은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특별히 대우받을 자격도 없고, 대우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다같은 형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 형제의 관계에서 목사는 빠져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당시 종교 지도자이고, 선생이고, 신앙의 아비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선생도 아비도 지도자도 아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형제일 뿐입니다. 형제라고 해서 그 안에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는 형님과 동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 같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로 모여지게 된 것은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감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종교심 때문에 교회를 찾았다면 그 사람은 비록 모임은 함께 한다 할지라도 같은 은혜와 사랑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대한 다른 목적이 자리하게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나온 분들과는 항상 다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른 모습이란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나오지만,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나 취미로 교회를 찾은 사람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바라보게 되고, 목사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때문에 다른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갈 뿐, 그외 다른 눈에 보이는 대상을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사가 교회 중심이다는 말도 성경과는 전혀 다른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목사가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가 좀 부족하고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지도자, 아비, 선생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고자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대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는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는 것을 즐겼고, 자기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적어서 머리에 두르는 경문이라는 것을 넓게 해서 차별을 두고자 했고, 옷술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크게 했던 것입니다. 잔치 자리는 의례히 상석을 차지하고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랍비라 하면서 문안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마치 목사는 지시하는 사람이고 신자는 그 지시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목사가 가운을 착용하고, 또 매주일 색깔이 다른 목에 두르는 후드라는 것을 착용함으로서 일반 신자와 차별을 두고자 한 것이나, 사람들로부터 '목사님'하면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을 신자들이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저나 여러분이 같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도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바램이 있을 수 있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지위를 행사하고 싶은 욕심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면 장로라는 지위를 행사하고 싶고, 권사면 권사라는 지위를 행사하고 싶은 욕심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또는 여러 봉사를 위해서 일을 분담하고 책임자를 세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봉사의 일이 주어졌을 뿐이지 결코 어떤 지위의 문제도 아니고 높고 낮음의 문제도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교회에서 어떤 직분에 매이지 않고 신앙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집사면 영원한 집사다.' 다시 말해서 집사가 한 번 되면 그 다음부터 목사는 그 집사를 계속 집사로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집사 일을 하다가 집사를 그만두게 할 때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에서 교회에 대한 반발을 가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지간하면 계속 집사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사 안됐다고 감정상하는 신자도 잘못이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집사를 맡기는 목사나 다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떤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서로서로 배워가야 합니다.

지도자, 선생, 아비는 오직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그 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분을 믿는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실력이 있다고 해서 그 목사를 의지하고 그 목사 때문에 교회가 잘 될 것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지도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목사를 대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도 함께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져가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를 대우하는 것을 즐기면 자신도 어떤 직책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통해서 대우받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대우받고자 할 때는 꼭 위선으로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면이 있어야 대우받을 조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기쁜 척 하면서 해야 하고, 억지로 감당해야하는 일도 많아지고, 남들 보기에 경건한 척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위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석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선생도, 지도자도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는 단지 성경을 전하라는 일을 하도록 세움을 입었을 뿐입니다. 성경을 깨달은 것도 목사의 실력이 절대 아닙니다. 내 것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같은 형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둥근 원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목회 포부를 이루어주는데 이용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나 신자는 같이 하나님을 믿는 한 형제로서 말씀을 통해서 같이 배워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이 먼저 그 모습으로 살아감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이 되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목사니까 당연히 신앙이 좋고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신앙도 없고 사랑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시오. 목사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친다고 목사를 존경할 필요도 없고, 목사를 대우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만에 하나 목사에게서 성경대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회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배우고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도 다른 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낼 때 그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을 깨달으며 고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섬기면 큰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자의 모습은 섬김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섬김의 모습을 보이신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 큰 자이십니다. 그렇다면 큰 자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큰 자입니다. 그러나 큰 자안에 산다면 그에게서는 섬김이 보여지게 됩니다. 섬김을 보였기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큰 자와 함께 하기 때문에 섬김이 보여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무쪼록 이런 모습으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