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마 24:3-14) - 45강

신앙은 한마디로 아주 낸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은 우리의 기분과 형편에 따라서 적당히 변화되거나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도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냉정하다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적당히 봐주면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칙을 내세우며 그 원칙에 벗어난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냉정하다는 것도 신앙은 우리의 기분이나 형편에 의해서 이리 저리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칙만을 제시하고 원칙대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 생활이란 나의 기분과 감정과 형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있어서 크게 잘못된 모습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 즉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형편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고 형편이 좋을 때는 교회 다니는 것도 재미있고, 사람만나는 것도 좋은데 무슨 일로 인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형편이 좋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교회 안나가고, 형편이 어렵다고 교회 안나가고, 마음이 아프다고 교회에 안나가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도 여러분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도 여러분을 달래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중심으로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신앙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나 형편에 의해서 신앙이 좌우되는 잘못된 길에 서 있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분이나 형편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십니다. 내 기분이 안좋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고 안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말씀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가 있고, 말씀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눈앞의 자기 일보다는 세상의 마지막을 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분명히 마지막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끝내겠다는 것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세상을 자기 기분에 좌우되어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좋은 일이 있으면 웃다가도 나쁜 일이 생기면 금방 울고, 금방 기뻐했다가도 금방 슬퍼하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신자는 '내가 지금 슬퍼한다고 해서 운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럴 때 신자인 내가 가져야 될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는 절대로 감정에 신앙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세상에 대한 한풀이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종말을 말할 때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종말 자체를 거부합니다. 즉 현재의 이 좋은 영화를 포기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종말을 말하면 '그래 이놈의 세상 콱 망해버려라'는 식으로 종말을 자기 한풀이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종말은 '세상은 망한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종말은 여러분의 현재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해주는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확실한 기준이 종말을 통해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종말을 무시하고 살면 모든 관심은 눈앞의 일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약간의 힘든 일만 일어나도 신앙도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낙심하고 슬픔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갈 때 관심은 눈 앞의 일이 아니라 먼 미래에 두게 됩니다. 때문에 현재의 일이 조금 힘들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러분은 종말을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종말을 통해서 현재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말을 믿는다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중점은 마지막 때에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누구인가에 두고 있습니다. 즉 종말을 아는 신자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들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절)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1절과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시고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 제자들이 성전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옵니다(1절). 제자들이 성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3:38절에서 예수님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2절에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마지막 때 남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때와 징조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징조를 말씀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고, 기근, 지진, 전쟁 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여러 일들이 눈에 보여져도 그것을 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이런 여러 가지 일은 세상이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바른 삶을 태도를 가질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다운 모습을 보여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뒤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종말은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왜 세상은 망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망해야 하는 죄의 모습에 내가 들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종말은 우리를 위협하는 말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37절에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노아 시대를 생각해보면 노아가 당시 홍수로서 세상이 망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개인의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노아의 주장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왜 노아의 주장을 묵살했습니까? 38,39절을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망한 이유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노아도 방주만 만든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서 일을 했을 것이고, 또 결혼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모든 관심을 자기 인생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인생의 행복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노아의 말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 노아의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 시대도 노아의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말해져도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합니다.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망하는 모습이라면 과연 그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노아와 같이 마지막 때에 관심을 두고 살면서 그 마지막을 외치고 있습니까?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멸하기까지 마지막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신자가 당장 눈앞의 일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을 소홀히 하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바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들을 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심판을 홀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틀렸다고 하는 말은 혼자서 주장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노아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겠습니까? 이것이 마지막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홀로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를 제대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어려움과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마지막 때를 아는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신자가 마지막 때를 알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날마다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가 아니고 좀더 좋은 것, 좀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약속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가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충성이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깨어 있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최고의 관심일 뿐입니다.

40,41절을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특별한 종교 행위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똑같이 평소와 같은 밭일을 하고 매를 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날마다 일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일합니다. 즉 일을 하는 목적을 자기 행복이나 많은 것을 얻기 위한 것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심을 두며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주인의 명령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가장 종다운 종은 주인이 언제 오시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명령한 것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는 자입니다. 종이 자기 형편과 기분 때문에 주인의 명령을 소홀히 하고 무시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간다면 그 종은 충성스러운 종이 아닙니다. 기분 좋으면 지키고 기분 나쁘면 멀리하는 것이 말씀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는 절대로 현재 눈앞의 일에 신앙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세상의 마지막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뒤를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과연 누구를 따라가는 삶입니까? 무엇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에 울고 무엇에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입니까?

세상의 마지막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땅의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을 말씀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을 보고 노아처럼 세상을 보고 선지자들처럼 세상을 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변경하지 않습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며 그 일속에서 세상을 포기하는 것을 배우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얻는 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