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마 25:1-13) - 46강

사람은 마지막이나 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슬픔이 있고, 허무함이 있고 서운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소유 본능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놓치지 않고 계속 소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의 대상이 자기를 떠나고 그것으로부터 결별될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과 아쉬움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해롭고 피해가 되었던 것에서부터 마지막이고 헤어짐이라면 오히려 기뻐하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것, 사랑하던 것, 즐기던 것으로부터 마지막이라면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자기가 좋아하던 T.V 드라마가 끝나는 것까지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것을 달가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자기 소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끝난다면 현재의 자기 소유로부터 결별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마지막을 용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주에 종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끝내버리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계획입니다. 마지막을 피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이 땅에는 그 무엇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세상은 끝나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신자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란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 때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여러분들은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세상의 마지막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이 종말을 거부하고 싶으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에게 종말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세상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의 소유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유로부터 떠난다는 아쉬움이 뭔가 여러분들을 종말에 대해서 거부하게 하는 쪽으로 붙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세상의 종말을 기다린다, 천국을 소망하고 산다'고 자신 있게 소리치고 싶습니까? 소리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의 마지막을 알고 천국을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자신의 소유를 만들고자 하지 아니한 사람은 세상의 환경에 매이지 않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 자신이 있습니까? 여기에 반박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일에 기뻐하고 나쁜 일에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죄인으로서 당연한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지은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에는 웃고, 나쁜 일에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웃음보다 먼저 부러움이 앞섭니다. 남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측은하다는 생각은 들어도 울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죄인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살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에 날마다 쉬지 않고 계속되어져야 할 문제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고 나서 실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유대인들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야기를 유대인의 결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지금의 우리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랑이 먼저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 잔치를 두 번을 하는데 한번은 신부집에서, 또 한번은 신랑집에서 합니다. 먼저는 신랑이 신부집을 가서 잔치를 하고, 뒤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서 잔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집을 갈 때는 낮에 가는 것이 아니고 주로 저녁에 갑니다. 그리고 신부집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신랑이 올 때 그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열 처녀가 합니다. 성경은 이 처녀들이 누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당시 결혼 풍습을 예로 들어서 신부 들러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누구냐라는 데에는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은 신랑을 맞이하여 잔치에 참석하는 것인데 그들 중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것이 오늘 이시간 우리가 관심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결혼으로 비유하시면서 왜 신랑이 밤에 오는 결혼을 이야기하십니까? 그것은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신랑이 올 때 세상은 밤이고, 신랑과 함께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자다. 이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열 처녀가 등장을 하는데 그 중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잔치에 들어가게 되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랑이 올 때 일어날 상황이라면,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서 발생할 문제라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의 미련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깨어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열 처녀가 슬기로운 모습과 미련한 모습으로 나눠지게 된 기준은 기름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잔치에 들어감으로 슬기로움이 증명되고, 준비하지 아니한 처녀는 들어가지 못함으로 미련함이 증명됩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하고 준비하지 아니한 것이 깨어있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깨어 있으라'고 할 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면서 잠을 잤고, 슬기로운 처녀는 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아닙니다. 5절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이 올 때 자고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깨어있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또 어떤 사람은 '졸며 잘새'를 나누어 가지고 슬기로운 처녀는 졸았지만 미련한 처녀는 잤다라고 하면서 조는 것은 잠을 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있는 모습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도 되지 않은 말입니다. '다'라는 말속에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섯은 졸고, 다섯은 잤다라는 것을 굳이 다른 모습으로 구분해서 슬기로움과 미련함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신랑이 올 때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강조하는 말이 되어서도 안되고, 교회에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라는 의미로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하자. 그래서 주님오실 때 깨어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해버리면 본문에 신랑이 올 때 슬기로운 처녀도 졸며 잤다는 말이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깨어 있으라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평소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삶이란 어떤 특정한 종교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24:40,41절에서는 모두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평소에 깨어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세상에서의 슬기로움과 미련함은 언제나 효율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행동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미련한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사고방식으로 본문을 바라볼 때 과연 기름을 준비한 것이 진짜 슬기로운 행동입니까?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고방식으로는 신랑이 늦게 와서 등불의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준비하면 된다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한 것은 신랑이 늦게 옴으로서 슬기로운 행동이었음이 증명된 것이지 만약 신랑이 일찍 옴으로 인해서 준비한 기름이 필요없게 되었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다섯 처녀가 오히려 슬기롭게 행동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일찍 오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러면 괜히 헛수고한 것이 되니까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가서 준비하자'는 극히 합리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고방식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시각에서 신자의 신앙생활을 볼 때 그들의 눈에는 아무 쓸데없는 미련한 행위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왜 신앙생활에 소홀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 현재 더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중에 해도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예수님을 배우는 것보다 세상 학문을 배우기에 더 열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되지만 공부는 당장 자신의 인생을 판가름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신앙보다는 공부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부모부터 자기 자녀가 신앙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을 두기를 바라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세상적인 사고에서 볼때는 지혜로운 것이 됩니다.

현재만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신앙을 너무 계산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하면 현재 삶에도 복이 된다는 말을 목회자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유익을 제공해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이기 때문에 현재 주님이 아직 안오셨다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 주님이 안오셨으니까 우선 급한 것은 세상일이다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오셨으니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현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주님이 안계신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한 모습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극히 지혜로운 삶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이 현재 자신에게 와계신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는 항상 현실을 생각하고 현실에 맞춰서 자기에게 유익 되는 쪽으로만 살아가지만 슬기로운 처녀는 현재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 일을 지금 일어난 일로 앞당겨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나중 일을 나중 일로만 생각지 않고 지금의 일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행동이고, 깨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는 문제는 나중 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지금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나중 일을 나중 일로만 생각하면 현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미련한 모습입니다. 물론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지혜로운 것이지만 주님이 오셨을 때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미련한 모습으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내 앞에 오셨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충성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들 앞에 계시는데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울고, 무엇 때문에 웃습니까? 주님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 원하십니다.

지금 신자의 삶은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을 말하면서 세상보다 신앙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모든 것은 판가름됩니다. 우리는 그 때를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먼 미래의 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일어난 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진심을 천국을 기다리고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세상으로부터 미련한 소리를 듣는 것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이 오셨을 때만을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슬기로움과 미련함의 차이점은 신랑이 오신다는 것을 미래의 일로만 여기느냐, 아니면 현재의 일로 여기느냐입니다. 신랑이 오신 것을 현재의 일로 여기며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신랑이 오시는 날은 세상은 망하는 날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것을 지금의 일로 보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자의 삶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현재를 보며 사는 삶은 불안과 염려와 울음과 슬픔의 연속입니다. 현재에서 자기의 소유가 있기를 바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여기며 사는 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