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비유(마 25:26-30) - 47강

오늘 본문의 말씀도 앞의 열처녀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취미생활이 아니며 '밑져야 본전이다'는 식으로 장난치듯 해서도 안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천국에 간다는 문제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하는 것이니까'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쉽게 지나쳐 버린다면 결국 천국 아닌 천국을 소망하다가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를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입니까? 십일조를 잘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구제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천국에 가는 근거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의 확신입니까? 하지만 자기 스스로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신자다'라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 최면이나 자기 고집이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통해서 점검해야지 자기 스스로 어떤 행위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나는 천국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천국 아닌 천국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믿어왔던 천국에 대한 모든 생각은 버리고 처음부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단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들어간다'라는 말로 그쳐 버려서는 안될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고, 예수를 믿는 것도 교회를 다니거나 어떤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 잘하면 될 것아닌가'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천국은 지금 내가 하는 행위를 근거 삼아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 열심히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느긋한 마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못하면 내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못한 것 내일 용서를 구하고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그 사람을 천국에서 상관없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못하는 신앙생활을 내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 살면서 오늘은 못했지만 내일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믿음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신자라면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했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믿음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는 자세를 가질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이미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열 처녀 이야기나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인가? 한마디로 천국에 가기 전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곧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이미 오신 것처럼, 주님이 자기 앞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일찍 오거나 오지 않는다면 기름을 준비한 것은 아무 쓸데없는 행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는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처녀가 가장 합리적이고 유능하고 지혜 있는 처녀로 인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적인 지혜로 생각하면 신랑이 올 때 기름을 준비해도 충분합니다. 따라서 미리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것은 어떤 효율이나 세상적인 이치를 가지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부족하면 그때 준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와 그 시는 모르니까 미리 준비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오시는 것을 먼 훗날의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주님이 오실 때 잘하자' 이것은 자기를 위한 합리적이고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은 세상적으로는 합리적인 생각이 되지 못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이것이 슬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종의 비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는 이 비유를 달란트 비유라고 이름짓고는 교회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강조합니다. 신자에게는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있는데 그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묻어두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해야 하고, 건강이 있는 사람은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고,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받은 달란트가 있으니까 장로일, 집사 일에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교회 일을 하건, 헌금을 하건 모든 것은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인용해서 떠밀 듯이 맡기고 강요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있다면 '나는 신자답다'는 교만과 자기 의만 드러내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어떤 주인이 다른 나라를 갑니다. 여행을 갔든 사업을 하러 갔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서 각기 일을 맡깁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나머지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으로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역시 장사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그 두 종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것을 고스란히 내어놓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칭찬을 들은 종과 쫓겨난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장사해서 남겼기 때문에 칭찬을 들은 것입니까? 차이는 주인이 없을 때 종들이 보였던 태도에 있습니다. 원래 종이란 아무리 일을 해도 그 소득은 자기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주인의 소유로 들어가게 됩니다.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에게는 힘만 들뿐입니다. 때문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종이라면 주인이 없을 때는 게으름 피우고 놀다가 주인이 오면 열심히 일하는 척 할 것입니다. 즉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을 들은 두 종은 주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태도로 일했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주인이 있을 때와 동일하게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남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모습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를 중심으로 삽니다. 주인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서 주인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시킨 일을 자기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일해봐야 주인만 좋은일 시키고 나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니까 안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갈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악한 종은 핑계를 댑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음으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납고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종은 주인에게 '당신은 사납고 인색하며 심지 않은 데서도 거두시는 분인데 내가 만약 한 달란트를 사용하다가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당신은 나에게 본전을 요구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의 본전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결국 악한 종은 주인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주인을 비방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주님은 주인이 없는데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사람이 누구냐를 묻고 있습니다. 결코 누가 많은 것을 남겼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주님이 없는데도 주님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주님 일을 하는 사람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것같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때 주님을 위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과는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오직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만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의 힘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 눌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만을 생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어떤 삶을 원하시는가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어떤 장애가 있어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천국 가는 종의 모습입니다. 천국을 장차 들어가는 곳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함으로 천국에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위 자기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앞에 계시는데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을 현재 없는 분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날마다의 삶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버리고 결국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악한 종으로 판결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실컷 살아가면서 십일조 바치는 것 때문에 자기를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받으십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헌금은 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라면 아예 헌금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기를 위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더 유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에서 잘못된 부분은 노골적으로 지적하며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건 그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여러분들이 그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로 고쳐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자만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에서 어긋나는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살든지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충성된 종의 모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