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마음으로(마 25:31-46) - 48강

믿음은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인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지도 않으시고 행동을 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있는데 제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봐야 그 말 때문에 믿음이 있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현대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어떻게 신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함부로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신자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죄를 고백하며 주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는데 왜 함부로 그것을 부정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분명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으면 제아무리 신앙 좋은 신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믿음의 모습보다는 인간들의 종교관에 의해서 믿음의 모습을 결정지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대한 충성의 빈도, 또는 사회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의 정도를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풍토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 신자나, 했던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점검할 때도 그 기준을 종교적인 행위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출석, 십일조, 기도, 성경읽기, 구제 등등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이웃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믿음이 있다. 때문에 심판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합시다. 서로가 만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세상을 살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평생을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불구로서 지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남자는 번민을 하게 됩니다. 그 여자와 계속 지내야 할 때 자기가 겪게될 고통과 희생을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여자를 떠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남자는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여자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자기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님 사랑에도 이런 모습이 많습니다. 자기 사랑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신자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말은 하지만 그 십자가의 주님의 십자가일 뿐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믿음을 판단하신다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만족하고 있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보신다면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드렸던 그들의 행위를 칭찬을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며, 섣불리 자신의 신앙적인 행위를 가지고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을 심판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자, 그자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자이며 심판에서 제외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이며 그 마음으로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자가 영벌에 들어가며, 어떤 자가 영생에 들어가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은 영벌과 영생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구분되는 기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에 들어갈 자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5, 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즉 주린 자, 목마른자, 나그네 된자, 벗은자, 병든자, 옥에 갇힌 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느냐가 영벌과 영생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법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 이대로 하면 천국 가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극히 단순한 것이 믿음입니다. 전혀 복잡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반대된 편에 서서 믿음에 대해서 들을 때에서 아주 복잡한 것이 믿음이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언뜻 보면 예수님이 구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영생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자녀다운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새벽기도에 나와서 조용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자녀다운 모습입니까? 예배시간에 경건하게 찬송 부르고 있는 것이 자녀다운 모습입니까? 제가 종종 예배나 기도의 행위가 신자의 표가 아님을 말하는 것은, 예배나 기도를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안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배나 기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신자의 표로 삼거나 의로 내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못한다거나, 남들과 같이 봉사를 못한다고 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의구심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하지 못할 때 '내가 과연 성령 받은 자인가?'라는 의구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은 오늘 본문에서 낱낱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로 구분한다는 것은 그냥 구분을 말하는 것이지 양과 염소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양과 염소의 성격이나 특성을 가지고 구분점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양은 목자를 잘 따른다고 하면서 목사에게 잘 순종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염소는 잘 들이받기 때문에 목사에게 반대하고 순종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모두 자기 아집에서 나온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34절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35,36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하셨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라고 합니다. 이들은 아주 의아해 합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주님을 선대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다른 자를 통해서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있는 대로 주린 자, 목마른자, 나그네 된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을 가진 자가 곧 주님의 모습을 가진 자였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들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는 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주리고, 주님 때문에 목마르고, 주님 때문에 나그네 되고, 주님 때문에 벗은 자가 되고, 주님 때문에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된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가리켜서 형제라고 말하고 이 형제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형제는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한다고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고통의 자리에 있게 된 자들이 있고, 또 그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자들이 있는 것, 그것이 형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께 자기의 정성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 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구제한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어려움과 수난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모습은 분명히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때문에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는 자들은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복음만을 나타내기를 힘쓰고,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힘쓰는 자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는 것, 그들을 무시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에 함께 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 때문에 마음이 하나되는 것,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 같이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행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윤리나 도덕이라고도 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이고, 장차 영생에 들어갈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곤란에 처하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봅니까? 과연 그런 분들을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십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지내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해서 다른 특별한 말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추수감사절을 기독교의 전통대로 우리를 이 땅에서 먹이시고 살리신 것에만 감사하는 그런 날로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은 모르십니까?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가 잘된 것만 연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년 내내 힘들게 살고 여러 우환이 끊이지 않았던 가정은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남들은 웃으며 감사할 때 이 가정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우환이 끊이지 않은 가정으로 낙인찍혀서 기가죽은채 추수감사절을 지내야 합니까?

오늘 여러분은 내가 과연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주님의 마음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알고 감사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를 대하는 마음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단지 위로해주고, 걱정해주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준다고 그것을 주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은 예수님을 몰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에 있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한 그 형제가 자신의 어려움을 통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더욱 바라보기를 원하고 기도하는 그 마음을 주님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내가 낮아진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높아진 자리에서는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형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낮아지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욕을 받기도 하는 것인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이 주님의 모습으로 보여지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이름이 나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주님의 모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의 눈에는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형제가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영벌에 들어갈 자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고, 안되는 길로 끌고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로 끌고가신 것 같이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 우리의 원함과는 정반대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알았다면 실패의 자리에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낮고 천하고 연약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조심할 것은 어려움을 당한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높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이 들었는데 무조건 '병이 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도 병이 들므로 인해서 '생명이란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내가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구나 이것이 내 잘못이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을 때 병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나중에 건강하게 되었을지라도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고 40절에 나온 대로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들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럴 때 그 형제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들은 형제의 애매한 어려움과 고통에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보면서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신자의 모습이며 마지막 때 그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이런 마음이 보여집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는 신자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