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피(마 26:26-29) - 49강

사람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습성으로 인해서 뜻하지 않게 오류를 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상대방을 눈에 보인 그대로 평가하려다 실수하는 일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인간관계의 문제일 뿐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습성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때 크나큰 문제점은 크고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신앙으로 연결되어질 때 결국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의 기준도 눈에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좋아서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은 신앙도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봐도 다른 것을 두고 볼 것도 없이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저도 스스로에게 속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공부한 신학교가 컨콜디아라는 신학교였습니다. 컨콜디아라는 신학교는 그래도 정통이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이름이 있는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학교에서 배운 목사님이라면 성경을 제대로 잘 알고 계실 것이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고 얘기를 나눈 결과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가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분이 공부를 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학교 간판을 기준으로 내세운 제 스스로에게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교회가 목사를 청빙한다고 합시다. 후보가 두분이 있는데 이력서를 보니까 한 분은 정통 있고 유명한 신학교 출신이고, 다른 한 분은 이름도 없고 알지도 못한 신학교를 나오신 분이라고 할 때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앞서 말한 저의 경우와 같이 출신 신학교를 가지고 판단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는 신학교를 나오신 그분이 오히려 주님에 대한 사랑과 복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는 분이고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신 분은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는 분이라면 그 교회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나머지 참된 복음을 멀리 해버린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을 때 사람을 잘못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주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분을 배척하고 멀리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크고 많다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에서 주님을 찾기보다는 크고 많은 것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진짜 주님을 모습을 담고 나타난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벌에 들어가는 악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은 한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아무런 쓸모 없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있으면 귀찮은 존재이고, 다른 교회로 간다해도 하나도 아쉬워 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아할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굳이 세상이 가치를 두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왜 버리고 무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크고, 많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세상적 기준, 세상적 가치관이 바로 악한 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가치관에 의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이런 가치관에서 떠난 자입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랑하는 주님은 자기 교회를 부흥시켜주고,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주님 아닌 주님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 의해서 버림 받으셨고, 지금도 버림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나의 잘못된 기준에 의해서 나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작은 자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하나하나 찾아내서 도와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도우시면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단지 가난한 자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자로 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를 이토록 장황하게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자 속에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주님을 찾아도 모두가 보이는 것을 위해서 찾게 될 뿐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이 심판주로 오실 때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25장에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흔히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셨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하고, 그 성찬식에 참여함으로 자신은 십자가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것이 오늘 우리들과 어떤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내 몸이다', '내 피다'고 하셨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만 소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성찬식용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의식과 연관지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지금 의식을 만드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자, 십자가에 참여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위해서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십니다. 물론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말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말을 맞게 한다고 해서 바르게 알고 있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바르게 알고 있다고 바른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삶의 바탕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는 것은 한낱 지식으로 그쳐버릴 뿐입니다.

현대교인들이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죄사함도 교회에 와서 자기의 죄를 말하고 용서해 달라는 말 한마디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용서해 달라는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일에 예배 빠졌다던가? 기도를 게을리 한다던가? 남을 욕했다던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죄를 끄집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삶속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사함이란 예배 빠지고, 기도 안하고, 성경보지 않고, 봉사안하고, 십일조 안하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겨우 그런 문제 때문이겠습니까? 그런 문제라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우리가 조금만 의지가 있고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죄용서는 우리의 전체입니다. 나의 인생, 나의 삶 전체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일부분이 아닙니다. 전부입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되는 부분이 있고 죄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가 되지 않는 일을 교회와 연관짓게 되고, 결국 교회 일은 무조건 선한 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죄다, 아니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배참석하면 죄안짓는 것이고, 십일조 잘하면 죄안짓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배드리면서도 죄짓고, 기도하면서도 죄짓고, 심지어는 밥먹으면서까지 죄짓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배가 죄고, 기도가 죄고, 밥먹는 것이 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인간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즉 새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 사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죄가 되는 부분만 골라내어 가지고 그것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사함은 우리 인생 전체가 주님이 아니라면 망하는 인생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잘못된 부분만을 골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시각으로 선한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도와준 것이 있으면 이것은 선한 행위니까 여기에는 주님의 피가 필요 없다는 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좀 복잡한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자신과 주님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채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29절의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죄사함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데 죄사함이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관계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지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 십자가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나쁜 일을 했을 때만 주님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을 주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가치를 주님의 십자가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자기의 인생은 아무런 가치 없는 인생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주님께 모든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주님께 인생의 모든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좇아가는 것은 주님이 아닌 세상의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자들에 의해서 주님이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6-16절의 내용입니다. 6-16절을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이고,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가룟유다는 자신의 삶 전체의 죄문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자기 육신에 도움을 주는 메시야로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결국 돈 몇 푼이 더 가치 있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주님의 가치를 자기에게 있는 그 어떤 귀한 것보다 더 귀한 분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의 가치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보고 제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화를 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행위에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을 때는 주님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죄로 보지 못하고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에는 주님의 피가 없어도 되고, 악이 되는 것에만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할 때도 자기가 생각할 때 악이 되는 것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고 말은 맞게 하면서 정작 삶은 주님의 피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교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하시는 것은 떡을 먹음으로서 우리의 몸이 주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찬식을 할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해서 우리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고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성찬식을 부지런히 하면 주님과 같은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내 몸이다, 내 피라고 하신 것은 너희는 이제 너희 몸이 아니라 내 몸으로 세상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내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것으로 살 때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지만 주님의 몸으로 살 때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모르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란 결국 나는 죽고 내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용서 안에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할뿐입니다. 죄지었다고 생각될 때만 예수님을 불러서 용서받고 복과 천국을 보장받아 놓자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지 않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용하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주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당긴다면 결국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실망과 낙심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버리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과는 전혀 멀어져 버린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해도 주님의 몸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으로 살고, 주님의 몸으로 일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의 피로 살려내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몸으로 사십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여러분에게 주님이 가장 가치 있으신 분으로 여러분을 간섭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가치 있는 분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주님의 간섭을 귀찮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주님이 가치 있는 분이라면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