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교회 생활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일에 게을러서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사회생활과 똑같은 시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닌데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기도하라고 강도하고 전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많이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겨버립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한 사람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게을리 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남보다 기도 못하고, 전도 못한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종교적 열등의식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서 자신은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많이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반대로 기도도 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교회 일에도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시고 벌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과 주님을 알고 난 후의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주님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주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작정 성도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봉사 충성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제이 제 삼의 베드로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열심이 있는 신자들은 자기 열심을 믿음의 근거로 삼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이 있으니까 주님의 말씀은 무엇이든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교회 일에 열심만 있으면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주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열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절)는 주님의 말씀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33절)라고 자신 있는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베드로는 거듭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면서 호언장담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가 자신의 자신감을 내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부인할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자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약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이 있고 자신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제자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마지막 때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열심은 분명 위대한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가 주님을 버렸습니다. 결국 열심은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때문에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 일에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기도 안하고, 전도 안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고, 주님은 그런 나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에 빠진 그 자체가 주님의 피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심 있는 자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열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피는 기도도 안하고, 전도도 안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아무 도움도 안되는 단지 명목상의 주님일 뿐입니다. '주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는 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며, 잘 넘어지며, 잘 실패하며, 자주 주님을 부인하는 자인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때문에 그런 무수한 실패가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천국에 보내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만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열심을 믿는자라면 자신의 열심을 믿지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하겠습니까?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회개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의 열심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함으로 신앙의 열심을 내세우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신앙인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단지 기도의 방법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함께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들어서 새벽기도를 강조하거나 철야기도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제자들이 왜 졸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왜 마지막 기도에서는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를 일부러 제자들 앞에서 하십니다. 즉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기도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모두 자기의 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제자들의 각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각오가 주님의 길을 따르도록 하는 믿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 앞에서 기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지금 주님이 하고 계시는 기도는 주님만이 해야할 기도가 아니라 앞으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할 제자들도 해야 하는 기도인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만도 아니라 오늘날 주님의 길을 가야할 모든 신자들이 해야할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39절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고난의 잔을 이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주님의 길을 가는 신자들이 해야할 기도는 고난의 잔을 이기기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잠을 잤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주님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금 예수님은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기 직전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시는 마음은 탄식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까지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세상 안에서 고난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과 같이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자기들은 열심이 있으니 끄떡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어떤 문제도 없고, 위험도 없었습니다. 즉 기도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평안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고난도 없고, 핍박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약간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위해서 기도하고, 고난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할 때 흔히 그렇게 하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잠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인 것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삼스레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의미없이 느껴진 것입니다. 또 자신의 환경이 아무런 고난도 없고 시험도 없고 날마다 평안하기 때문에 고난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도 의미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과연 기도할 것이 없습니까? 기도할 것이 없어서 기도에 나태합니까? 지금 잘 살고 있고, 평안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잠자는 제자들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형식적입니다. 현재의 삶에 긴장감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에 서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기껏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식 신앙으로 잘 자라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정이 평안하게 해주십시오' 이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면 자신은 평안하니까 남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한 대로 자신은 지금 주님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다른 법이 나를 붙잡아 죄의 길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 마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있을 때 그 열심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과 똑같이 세상에 그대로 자리하면서 주님을 믿으려고 하고 천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고, 교회 일 하는 자신의 열심만 가지고 '내 신앙은 됐다'라고 안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혹에 빠져있는 상태이며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이며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유혹에 빠져있고, 시험에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합니까? 발견하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에 있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하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자식을 통해서 하고, 사업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식이 잘되기만을 기도했고, 사업이 잘되기만을 기도했지 자식 때문에 걱정 근심에 빠지고 사업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고 있는 자신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시험에 들어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잠자고 있는 상태입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겠다는 간절함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멸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잘되보려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신자되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주님이 세상에 남기신 천국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신자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주님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려고 하면서 스스로는 주님을 따르고 있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고 있다면 자신의 기도가 과연 주님을 길을 따라가고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세상에서는 한발자국도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기도는 모두가 세상에서 앞서가기 위한 기도가 되버립니다. 교회에서 일군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결국은 교회에서 앞선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나이드신 분들의 기도에 자주 시비를 거는 이유는 아무리 평생토록 그렇게 기도하셨다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결국 주님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기도 내용이 조금 잘못됐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이드신 분들에게 조금 상처가 되고, 저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저는 잘못된 것을 가르쳐 드려서 십자가의 길에 서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되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저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움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필요한 것이지 단지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서 목사가 필요한 것입니까? 목사는 교회운영하고, 예배드리고, 성찬식 인도하고, 세례주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잘못된 부분들,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져있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들을 말씀으로 지적 받고 책망 받으면서 날마다 세상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주님께로 빠져들어 가는 신자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평안할 때는 이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긴장감을 가져야 하고, 평안하지 못할 때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고 산다면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함없이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주님께로 점차 빠져들어가는 그 기쁨은 참으로 큽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는 기도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현재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만드신 천국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할 때 그것이 여러분을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며, 세상에 머물 때 알지 못했던 기쁨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