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힘이 있어야 행세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호할 힘이 없는 자들은 자연적으로 힘있는 자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돈이 힘이 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 남을 속여서라도,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뇌물을 받으면서까지 돈을 모으고자 합니다. 돈과 함께 권력도 힘이 되고, 또는 아름다움도 힘이 되기도 합니다. 자식이 힘이 되기도 하고, 남편이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이 되는 것을 자기들의 소망으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축척되어 있는 힘을 바라보면서 마음 흡족해하고 세상 그 어느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처음에는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나라는 오직 말씀으로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어진 그 상태 그대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 주신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에게 힘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하나님같이 된다'는 그 말에 마음이 쏠리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보다는 힘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타락된 것입니다. 그후로 세상은 아담의 형상을 따라서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힘을 배격하는 이유는, 인간이 힘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에게 힘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힘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를 들여다봐도, 기독교를 들여다봐도, 여기저기 종교란 종교를 다 들여다보면 부르는 신의 이름은 각기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국 힘의 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교회들이 정작 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한낱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놓고도 자기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잘 섬기고 있고 신자답게 살고 있다고 하나님께 그 대가로 복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관이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이 왜 망하는 줄 아십니까? 힘의 나라이기 때문에 망합니다. 의의 나라가 아니라 힘의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은 필연코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을 짐승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다니엘서 4:25부터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처럼 되는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왜 짐승처럼 되는 벌을 받습니까? 그는 힘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대하고 힘이 넘치는 자신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흡족해 하면서 그 모든 것이 자기의 힘이라고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짐승처럼 만들어서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더 힘이 있으시고, 영원한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만인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유지되고,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 나라는 짐승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666이란 짐승의 수도 결국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서 강해를 통해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힘을 좋아하고, 여러분도 힘을 원하며 살아가겠지만, 하지만 여러분, 힘으로 살아가고 힘을 추구하는 그 자리가 바로 멸망의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힘은 하나님을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장 룻의 가족들만 하여도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당초 힘을 따라서 그 지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힘은 우리의 구원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장애물로 등장할 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한 것도 모두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힘을 배격하고, 대신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결국 사람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사십니까? 여러분에게 남들보다 힘이 적다고 한탄하며 한숨쉬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왜 바라보지 못하십니까?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고 말은 하면서 왜 자꾸 세상의 힘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20: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은 병거,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교회나 신자된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것은 세상을 살아갈 만한 힘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힘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불교에도 다른 사이비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도 결국은 자신도 힘을 소유한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능력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는 능력이고, 물리적이며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능력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죽는 능력을 주시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능력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 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능력을 구하시지 않겠습니까?
고후 13:4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약한 모습으로 세상을 사셨고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는 동일하게 약한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이 자꾸 이방인과 동일하게 돈을 좇아가고, 출세를 좇아가고, 권력을 좇아가는 것입니까? 이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모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에게 힘이 없음을 애통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가 없음을 애통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공부못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자녀에게 믿음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 힘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다가 큰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왔습니다. 큰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검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요 18:10절에서는 그 사람을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소 급했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힘으로서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무리들에게 힘으로서 대항을 한 것입니다.
'힘에는 힘이다'는 방식을 내세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검이란 힘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힘을 가진 자는 힘으로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힘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물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 권력 등을 자신의 힘으로 내세우고 행세하며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이런 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소망하고 추구했던 힘이 그들을 멸망으로 들어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것은 진짜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53절에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진짜 힘이 없어서 이렇게 잡히고 있는 줄 아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힘을 쓰시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54절).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을 지키고 보호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히시게 하신 것 같이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키심은 모든 적을 무찔러 주는 것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힘에 의해서 잡히게도 하고, 당하게도 하십니다. 힘들도 어려울 때 하나님은 가만히 침묵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낙심하고, 슬픔에 빠지기도 하는 모든 이유가 바로 나 자신만을 바라보고, 정작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세례 요한이 목이 잘려 죽을 때도, 선지자들이, 제자들이 세상에 의해서 죽어갈 때도 침묵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셔서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의 지혜가 주어진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그토록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때로는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는데도 하나님이 왜 그냥 두고만 보고 계시느냐는 문제와도 일치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외에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나 무리들은 모두 힘의 세계에서 힘으로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56절에 있는대로 상황이 자기들에게 불리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는 같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앞서자 모두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랐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서 자신들의 모든 믿음과 복음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눈앞의 작은 돈이 예수보다는 더 힘이 된다는 판단아래 예수님을 팔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은 자기들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들을 반대하는 한 사람을 잡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물리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에 의해서 당하심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되는 나라를 세상에 남기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 희생과 섬김과 사랑으로 유지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세상을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자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파벌이 형성되고,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힘을 굳혀서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지기 싫어하고 머리 숙이기 싫어하는 것이 세상나라입니다. 그러나 에수님은 친히 눌림 받고, 머리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머리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아닌 것에는 분명히아니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설령 그것 때문에 상대방의 힘에 으해서 고초를 받고 눌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복음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을 두려워하고 낭게 닥칠 결과를 겁을 낼 때는 결코 복음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의 힘에 의해서 죽게하십니다. 의의 나라는 힘의 나라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을 따른다면 과연 무엇을 보여줘야 합니까? 주님과 함께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양보하고, 손해보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툼은 언제나 손해보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합니다. 힘을 가지고 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눌림 받고 무시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억울해서 어떻게 사느냐?'라고 반문하시겠지만 억울하다는 감정조차 결국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자신이 보기에는 억울함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천국시민의 모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