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점입니다. 누구나 이것을 고백해야만 신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세례문답을 할 때도 이것을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고백이 가짜다, 진짜다라고 어떻게 섣불리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의 열정 하나만으로 버텨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에 우리는 믿음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 신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고 해도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출애굽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의 재앙이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백성이니까 처음부터 장자의 죽음에서 제외시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문에 발라놓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냐 애굽이냐가 아닙니다. 누가 어린양의 피를 발랐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즉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의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 어떤 열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문에 바른 것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양을 보면서 그들은 피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피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당연한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믿음은 상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머리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피를 믿는다!'는 이런 말을 누가 못합니까? 교회에 나온 사람치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피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에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도 잘 아십니까? 잘 아시면서 왜 자꾸 자기 열심, 자기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십니까? 인간의 열정이 피를 믿는 믿음의 증거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피를 믿는 믿음의 증거가 오직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년간 일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열정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계셨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열정도 아니고 열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사는 것뿐입니다. 마 12:50절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외에는 그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할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열심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열심과 신자가 아닌 자의 열심히 다른 것은 한쪽은 자기를 부인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열심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부각되어지는 열심이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열심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기를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1등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열심이 식는 것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혹시 믿음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불안해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열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비상수단으로 기도원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기도원에서의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열심히 기도원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이것이 열정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신자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1, 2 등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앙에 서열을 매기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서열을 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각각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않지를 원했을 때도 예수님은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는 자는 주님이 마시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이고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마 20:20-23). 여러분, 주의 좌우 편에 앉는 자는 열심히 있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생각하는 열심은 결국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끌어 모으는 전도의 열심, 앞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찬양의 열심, 성경을 많이 읽는 열심, 교회 일이라면 집안 일도 뒤로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봉사의 열심, 이러한 열심들이 나 자신을 주님의 피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열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앞서 말한대로 열심히 없을 때 스스로 믿음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열심, 열정이 곧 믿음의 증거가 아니다는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열심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가 있게 되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 때문에 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열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열심 때문에 때로 전도도 하게되고 사랑으로 봉사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갈림길에 서게 된 경험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인가? 세상을 따를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실패도 하면서 살아갈 때 자기 열정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거나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기로에 서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기억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이 여러분을 피해갔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는 쪽으로 일하시고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도와달라는 요구가 먼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가 잘 풀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고민,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미 주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58절에서 다른 제자와 같이 도망가지도 않고 멀찍이 예수를 좇아서 대제사장의 집뜰에까지 쫓아간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베드로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냐? 아니면 자기 목숩이냐? 여러분이 베드로 같은 상황이라면 과연 어떤 쪽으로 가겠습니까? 혹시 지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쨌든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유익이 아니냐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아마 베드로도 그러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면해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자신의 열정으로 주님을 쫓던 한 인간의 실패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실패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세상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필요 없고, 누구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과시하면서 교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은 실패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덴 신자가 셀패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때 회개해야 할 실패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패, 실수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세상을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다가 드러나는 실패라면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라면 그냥 넘어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의 실패가 나와 있습니다.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열정을 보였던 베드로였지만 결국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그 선택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열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까지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위기만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를 향해서 욕이 나옵니까?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해!' 형편없는 베드로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욕을 하고 싶은 그 베드로가 지금 예수 믿겠다고 나와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위대한 스승 한분을 좇고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세상이냐 죽음이냐는 갈림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갈림길에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세상으로부터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수많은 갈림길을 겪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갈림길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입니다. 우리는 하늘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 백성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미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분리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소망을 도와주는 예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갈림길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순간순간 주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림길을 지워버리는 삶이 아니라 갈림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많은 실패 속에서 회개하면서 연약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75절에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주님을 부인했다는데 대한 후회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주님을 부인 안할 수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데 대한 통한의 눈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패하는 자기를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장담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를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나는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모르고서는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모르는 믿음은 결국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열정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의 실패 속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돈을 받고 판 가룟 유다나,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나 똑같이 주님을 거부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가룟 유다는 단지 주님을 팔았다는 후회만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그럴 수도 있는 인간임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마치 교회에서 어떤 신자가 실수를 했을 때 교인보기 창피해서 교회 나오지 못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실패를 연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우리들의 실패 속에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주님의 피는 실패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공한 인간은 주님의 피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미 베드로의 실패를 알고 계셨고, 그 실패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완변한 신앙생활을 꿈꾸지 마십시오. 남보다 뒤쳐진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거나 열등의식 때문에 낙심해 하지 마십시오. 앞서가는 사람들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은 자꾸 처지는 것 같고, 신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앞장서서 가시는 분이 아니고 제일 뒤에서 우리를 밀어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일등으로 잘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실패를 통곡하는 자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자꾸 엉뚱한 모습이 드러납니까? 그래서 낙심이 되고 신앙에 재미가 없습니까? 그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모습을 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 본모습을 깨닫고 주님께 나오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것이 새사람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수시로 실패의 자리를 남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열심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피를 의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실패의 자리에서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느냐를 물으실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실패를 아십니까? 혹시 실패의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소경은 아닙니까? 나는 지금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두가 베드로의 모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장담할 때부터 이미 실패의 자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을 때입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