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우리는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까지 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 우리들의 믿음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믿음은 자기 열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이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 분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말을 안할 수가 없었던 것은 베드로의 모습이 인간의 열심이나 열정은 믿음이 절대 아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열심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은 베드로같이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 어느 회사에 부장으로 일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회사의 회장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고 할 때 그것을 알게 된 교회 다니는 부장은 회장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믿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부러 교회 다닌다고 광고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회장이 예수님을 욕을 하고 하나님을 욕을 하면서 교회 다니는 그 간부에게 맞장구 쳐줄 것을 원한다면 '아니다'고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변호하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예수님을 욕하겠습니까? 또한 주일에 예배당 앞에서 우연히 그 회장을 만났다고 할 때 어디 가느냐고 묻는 물음에 '저 교회갑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예배당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 보이는 열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회장에게 잘못 보여서 감원 대상이 될 수 있는데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임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열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등을 돌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신자의 열심은 그 열심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그때는 주님 때문에 불리한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뜰에서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등장했을 때 베드로는 일순간 주님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 베드로가 현재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교회생활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열심을 신앙의 전부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에게 어떤 불리한 상황이 닥쳐온다고 해도 주님을 믿는 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냐, 신앙이냐는 갈림길에서도 신앙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좋아서, 나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살 수있다는 것 때문에 주님을 떠날 수 없고, 주님을 멀리할 수도 없다는 그 자체가 열심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열심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도 믿지를 못합니다. 세상의 힘이 주어져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려고 하고 안심을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될 때 타협을 해버리고 양보를 하면서 어떻게든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열심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데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리기를 주님은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인간은 약하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고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해도 해도 안되는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이제는 주님만 의지해야 살 수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주님은 곧 나의 생명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무능함을 아는 신자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무능함을 알아야 주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무능을 모르면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불신앙이라는 것을 모르는채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서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선택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감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는 종종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전에 '가룟유다가 지옥간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가룟 유다가 지옥갔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팔아 넘겨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으니까 지옥가야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한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어떤 죄도 극복합니다. 심지어 가룟유다같이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긴 그 죄까지도 십자가는 다 끌어당겨서 용서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판 유다는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깨우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유다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윤리적으로 통회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를 판 것은 잘못된 일임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후에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어버립니다. 유다는 왜 스스로 목매어 죽었을까요?
유다는 많은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는 전에 말한 대로 대단한 양심가입니다. 요즘같이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스승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세상에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양심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고 후회하는 것이 죄사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후회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란 인간이 무능하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능하다고 할 때의 무능은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을 말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사단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사단의 방식, 사단의 생각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생각만 보여지는 인간이 어떻게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모두 악한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고 결국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는 절대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괴로움을 느끼고 후회를 하면서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도 결국 주님을 바라보지는 못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최후까지 주님을 바라볼 필요성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괴로움과 후회의 내면에는 잘못한 행위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피가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인간이 자기의 생각대로 일이 안되고 실패하고 무너지는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알고 주를 바라봐야 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척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오해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오해와도 같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힘있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힘있는 메시야만이 자기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힘있는 로마에 의해서 압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을 구할 메시야는 당연히 힘있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메시야'라고 하는 그 분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은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힘을 얻어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고 메시야를 바라보는 이유였는데 정작 메시야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모습을 등장합니다. 돈 없고, 천한 신분입니다. 그렇다고 삼손 같이 힘이 센 것도 아닙니다. 때리면 맞고, 팔면 팔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를 메시야로 섬길 때 유대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계속해서 로마의 압제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계속해서 자기들이 상상하고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눈앞에 있는 데도 그 메시야를 죽이고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무능해지는 것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못하는 신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여겨버립니다. 힘있는 신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강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은 결코 강해질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임을 모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강해지려고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자기의 그런 신앙을 칭찬해주고, 자기가 약해질 때 힘을 줘서 일을 성공시켜주는 그런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앙의 힘을 풀무에 바람을 집어넣듯이 우리에게 힘을 집어넣어서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 그런 힘을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강해지려고 하고, 뭔가 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힘있는 신앙인이 되라고 하셨습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까? 예배당 세우고 교회 봉사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그런 모든 것은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어떤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까? 힘의 세상에서 힘으로 살려고 하는 죄입니다. 우리의 모든 실수는 힘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힘에는 관심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힘에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 부흥도 포기했습니까? 그러면 내 교회가 다른 교회와는 다르게 재미있고, 좋은 일 많이 하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까? 그 마음에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힘으로 삼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인간이 어디까지 힘을 원하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고, 작으면 작은 대로 서로 교제하면서 아기자기하게 신앙생활하면서 다른 교회에 내세울만한 것이 보여지지 않을 때 실망을 하고 교회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버린다면 그 이유는 결국 교회를 힘으로 삼고자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죄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어떻게 악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자는 힘을 원하고 있는 것이고, 약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자는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원한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약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약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의해서 힘으로 버티지 않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가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모르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상상 속의 그리스도를 좇게 될 것입니다. 약한 자로 오시고, 우리에게 같이 약해질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신자는 단지 내가 아는 복음대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반대를 당하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는 예수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다가 던지 은 삼십을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토기장이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스가랴서 11:12,13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목자에 대한 가치를 은 삼십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은 삼십은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고 연락이라는 막대기를 잘라버립니다. 이것은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은 유다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언약이 이루어질 족속을 말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과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은 삼십 때문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저주받아야 합니까? 그들은 힘이 있는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너무 힘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을 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룟유다의 죽음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자기를 벗어버리지 못한 자는 주님을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가장 밑바닥에서 약한 자로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힘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살겠습니까? 우리는 힘을 모으기 위해서 믿음을 달라고 하고, 은사를 달라고 하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힘을 버리지 못한다면 주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약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은 여러분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구원자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에게 힘이 되는 주님을 찾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 힘은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힘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약해지고, 무시당하면서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