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냐 예수냐(마 27:11-26) - 54강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는 그 사람의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좋아하거나 내 마음에 드는 어느 일부만을 골라 가지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랑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랑하는 그런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서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마음에 든다든지, 고운 마음씨가 마음에 든가든지, 성격이 마음에 든다든지, 다 제각기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마음에 들어서 사랑한다고 결혼한 부부가 왜 다투고 이혼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마음에 드는 부분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살면서 차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발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이혼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이혼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다투며 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고서라도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세계에서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교회는 사랑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인된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원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목사가, 다른 신자들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흐뭇하게 해주는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는 사랑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 사람에게 교회는 사랑이 없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사랑이 있는 교회를 기대하고 꿈꾸는 것은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이 땅에서 보이는 제도적인 교회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물론 상처를 주는 외부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사랑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어긋났을 때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 마음의 상처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집에서 구역예배를 모입니다. 자신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구역예배에 잘 참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 기다렸는데 하필이면 그날 많은 분들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심정을 충분히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집에 왔을 때와 적은 분들이 왔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의 차이를 경험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신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소홀히 했다면 그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야 어떻든 왜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까? 구역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나에게 상처를 주게 된 것입니다. 내 집에 오지 않았다는 서운함 때문에 어떤 사정인가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남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내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해 버리지만 상처는 내 스스로가 입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이 없는 죄인 됨에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앞서 말한 대로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그런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야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인정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 교회를 출석하고 신앙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과연 진심일까요? 여러분이 거짓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주님은 어떤 모습의 주님입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는 주님의 모습은 없습니까? 진심으로 주님의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고,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시는 주님입니까? 만약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도 주님을 더 귀한 분으로 섬겨야 마땅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보다도 주님이 더 귀한 분으로 자리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런 믿음입니까?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 10:37). 이러한 주님이 여러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 산상수훈을 읽어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윤리와 도덕으로 보신다면 별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도 별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치의 부족함도 없이 다 이루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고 할 때, 그대로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너무 편하고 쉽게 보려고 합니다. 즉 나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고, 나무라는 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더러움이 보여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더러움을 다 알고 지적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섣불리 말씀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을 다 살핀 후에 천천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강도를 비교시켜서 이 둘중 누가 당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강도중 누가 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 같습니까? 뻔히 아는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일이 그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의 그때 그 일이 지금 이 은석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야 '아니 어떻게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강도를 원하지'라고 울분을 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그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엉뚱하게 강도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명절을 당하면 무리가 원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 전례대로 빌라도는 무리에게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라"고 무리를 선동합니다. 결국 무리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셨기에 강도인 바라바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하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강도가 죽는 것보다 예수님이 죽는 것을 더 원했습니까?

성탄절 때 성탄이 과연 기쁜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탄이 기쁜가를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단지 달콤한 사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가지고 오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기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선물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죄를 아는 자만이 생명되신분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산상수훈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계시고, 인간의 약점을 훤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합니다.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시면서 '마귀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지적합니다. 회개를 기대하시고 잘못을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앞에 예수님이 서 계셔서 여러분의 죄를 지적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불수레를 타고 오셔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서 우리들을 책망하신다면 금방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군천사와 함께 오시는 때는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예 심판을 위해서 오십니다. 잘못을 지적하러 오셨을 때는 천한 존재요 약한 모습입니다. 만약 이 은석교회에 어떤 거지가 예배를 드리러 와서는 은석교회는 신앙도 엉망이고, 자기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라고 심하게 나무란다면 '예 맞습니다. 우리는 너무 엉터리입니다'라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 필사적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장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신다면 왜 무리들이 예수님을 싫어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을 사랑할 때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야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서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강도 바라바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담이 되는 존재를 자기들 앞에서 치워버리고자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가리고, 잘못된 것, 실수도 가리면서 자신이 그럴듯한 존재로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기도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기를 좋아했고, 힘든 금식도 많이 했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를 하면서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나옵니다. 속에 감추어진 죄를 몽땅 드러냅니다. 예수님 앞에 서기만 하면 기가 죽고, 할말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없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유익이고, 자기 사랑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은석교회에 오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은석교회 목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도 여러분들을 책망하고 찌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사람들이 거부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말씀을 하셔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 중요한 사람은 자신이 찔림을 받을 때 자신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교회라는 단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책망하고 지적하시는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도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목사인 제가 성경을 그대로 말씀드릴 때 여러분이 그 말에 부담을 가지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불만을 가지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친 그대 그 무리들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내 마음에 드는 말이란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은 온통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말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인간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스스로 그 말씀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은 불교나 유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 기독교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부담과 거부보다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더 십자가를 바라보고 더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내 감정만 가지고 쉽사리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른 소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말을 하지 않고 듣기 싫어하고, 부담을 느끼게 되는 말을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있다면 그것을 환영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곁에 계신다면 잘못할 때마다 책망하고 지적하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사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이 내 곁에 계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래 주님이 곁에 계셔야 내가 정신차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내 잘못된 것을 바로 알아갈 수 있지'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주님 편에 서 있는자요, 바라바보다는 주님을 선택하는 자요,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백성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지금 여러분들 곁에 분명히 계십니다.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오늘도 지적하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만 드러나는 말씀 앞에 서기를 싫어한다면 그순간 여러분은 예수님보다는 바라바를 선택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적하고 나무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씀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피하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죄가 드러나고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자존심 상해하지 마시고, 거부하지 마시고 '예수님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죽을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 의지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우린 예수님을 내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골라서 사랑할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마음에 드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한 자에게만 예수님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신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심판을 아는 신자답게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