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받는 메시야(마 27:32-44) - 55강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드디어 십자가에 달려서 조롱을 받으시는 장면까지 도달했습니다. 죄목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죄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될 수 없는 출신성분을 가진 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대제사장과 장로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열심히 기다리긴 하였으나 메시야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이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도 하였지만 그들은 그 예언조차도 자기들 멋대로 이해하고 상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 무리들 속에 바로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마태복음을 들으면서 그리스도가 큰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뭔가 주님 곁에 있으면 항상 손해를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성공을 원합니다. 잘되는 인생, 편안한 인생을 원합니다. 그런 인생을 추구하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도 내가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기도하면 당장 달려와서 힘이 되어주시고, 내 가정에 평안과 행복을 주시는 그런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한발한발 띄어 놓을 때마다 내 머리에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들은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나의 복주머니로 알았던 그리스도는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나중에는 '그래도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생활도 도우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라는 반발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생에 뭔가 도움을 얻어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찾았다면 그러한 반발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을 말씀드리면서 가졌던 우려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강해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반발이 참된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과 소홀함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때 그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한 우려 때문에 그 반발을 삭히기 위해서 말을 바꾸거나 소위 부드럽게 설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반발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설교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를 전하고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사건 속에서 다시 한번 주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가에 대해서 외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으며 믿음과 믿음 아닌 것, 교회와 교회 아닌 것, 신자와 신자 아닌 것의 모습에 대해서 바르게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런 죄악이 보여질 때 가차없이 그 죄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힘쓰는 삶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신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덤으로 주어지는 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작 신자들도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이지 천국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야단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도 천국과 연관있는 신앙의 문제에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면 결국 또 여러분에게는 전혀 심각하지 않는 문제를 저 혼자 심각하게 여기고 있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또한 먼 옛날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하나의 비극으로만 들려지게 될 것이고, 혹시 나중 일을 계산해서 예수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결코 십자가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겠다는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는 신자아닌 신자, 신자라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전락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로 알고 그 십자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는 참된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과 장로들, 모든 무리들이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고 난후 죄인 아닌 죄인을 십자가에 매다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는데, 그 분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먼저 마귀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마귀의 사고방식에 놓여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귀의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같을 리가 없습니다. 전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다는 것은 마귀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정녀 탄생만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증거가 아닙니다. 물론 동정녀 탄생은 육으로 나지 않고 영으로 났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서도 죄인이 아닌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에게서는 마귀의 사고방식, 즉 이 땅의 사고방식, 땅을 지배하는 마귀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증거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교회아닌 증거는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그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통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마귀의 정신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 아닌 교회일 것이고, 예수님의 정신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듯 악한 죄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사기나, 강도, 도둑질, 살인 같은 그런 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는 사람들이 선호하고 오해하기 좋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윤리나 도덕 같은 모습으로도 다가오는 것이 마귀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제아무리 사회사업을 하고, 환경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교회가 교회 되는 기준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하는 사회사업이나 환경운동 같은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마귀의 유혹에 빠져있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선교를 수십 군데하고, 구제를 하고 철야기도에 열심이고 이런 저런 행사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교회 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고 있느냐가 교회 되는 기준입니다. 여러분, 은석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이적을 일으키시는 능력만 잘 이용하시면 떼돈을 벌 수 있었지만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기도원에서 병을 고친다고 안수기도하면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마귀가 하는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은사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육신에 대한 소망을 보리고 하늘을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을 바라보는 삶,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 삶,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는 삶,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자 되기를 구하는 삶, 세상의 것보다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그것으로 기뻐하고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삶, 이런 것들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주님을 이렇게 제대로 알고 살아간다면 과연 무엇에 소원을 두고,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겠습니까? 교회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제대로 안다면 과연 무엇을 목표로 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회사 사장이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사원을 단지 경제문제 때문에 회사를 위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 몰아버리는 이 세상 같이 교회에서도 당회장이란 사람이 부목사나 전도사는 자신의 비서쯤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잘못보이면 마음대로 짤라 버리는 그러한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부목사도 전도사도(사실 성경에는 부목사, 전도사가 없지만)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동역자로 대하는 목사가 그리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교회 아닌 교회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은석교회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부지기수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우리도 매달린 채로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십자가의 정신이 아닌가를 하나하나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듣고 모이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온갖 조롱을 다 받으십니다.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왕이 입는 옷의 흉내를 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왕관을 흉내낸 것입니다. 갈대를 손에 들리었습니다. 왕의 지팡이인 홀을 흉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래 왕으로 대우해줄께'하면서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손에 쥐어줬던 갈대를 빼앗아 가시 면류관이 씌어 있는 머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입혔던 홍포도 벗겨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조롱을 다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인데,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우리도 이런 길이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에게는 베드로가 검을 빼어서 종의 귀를 친 것이 더 마음에 들지, 때린 대로 맞고, 조롱하는 대로 다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릴 때 나도 같이 때리고 조롱할 때 나도 같이 조롱하는 것은 땅의 방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같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후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39절에 지나가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 지나가는 자들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형을 지켜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뭐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그러면 그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봐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줄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결국 뭐가 없어서 못믿겠다는 것입니까?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하는 것을 보니까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절대로 인간들의 손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소위 바보 같은 모습입니다. 자식이 밖에서 남에게 맞고 들어오면 '바보 같은 자식아 왜 맞고 들어오니'라고 하면서 꾸지람을 합니다. 자식이 남에게 맞아서 마음이 아픈 것도 있겠지만 남에게 맞고 들어오는 약한 모습이 부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물론 남에게 맞는 것이 무조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맞는 것은 바보 같은 것이고 남이 나를 때릴 때 같이 때려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임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남에게 맞고, 당하는 것을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눈에는 가난한 자, 약한 자, 힘없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나보다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나보다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내속에서 무시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마귀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에 힘들어하는 것은 신자인 우리에게서 주님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터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마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힘을 원하고, 약한 자는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알 때는 주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대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입니다. 때문에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지 않는 신자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죄악된 본성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뭐라고 희롱합니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자들과 동일한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또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고 조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모르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와 기뻐하지 않으신 자의 증거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구해주시는 것 같은 이적적인 일을 통해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어려운 일도 미리 방지해 주시고, 설자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잘 해결해주시고 오히려 더 큰복으로 채워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신자를 향해서도 하는 말이지만 신자들도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힘든 일이 끊이지 않을 때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아닌가보다'라고 스스로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분위기를 교회가 은연중에 조장하고 있는 것도 크나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도대체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 것이나 사도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일들이나 그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거나 겪게 되는 고초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을 삭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는 복음을 열심히 전했던 그들이 결국 복을 받아서 한편생을 갑부로 잘 살게되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드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을 강자로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강한 교회, 힘이 있는 교회, 세력이 있는 교회가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버리고 일부러 작은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모으는 것에 목표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에게 눈을 돌리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신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예수님은 세상 죄가 무엇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같이 약한 자가 되자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과연 어떤 십자가입니까? 그냥 입술에만 붙어 있는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장식용으로 그쳐버리는 십자가입니까? 나를 약한 자로 초청하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예수님은 큰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자기들 앞에 나타나는 예수님입니다.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군말없이 들어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합니다. 내편이 되셔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대해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예수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양의 탈을 쓴 이리, 즉 다른 예수, 마귀일 뿐입니다. 우스운 것은 이런 마귀의 방식, 마귀의 정신을 신앙이라고 다르고 있고, 성령이라고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약한 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어떻게 예수님으로 보여지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약한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인간들의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속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죄가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서 보여지는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죄를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고 약자로 세상을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심판 속에서 건짐받는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