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죽으심(마 27:45-56) - 56강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속에서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설교의 풍요 속에 있습니다. 주일의 두 번의 예배와 수요일, 그리고 매일의 새벽예배를 합치면 10회의 설교 시간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제자훈련이니 뭐니 하면서 성경을 접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그 어떤 기독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풍요입니다. 그러나 이 풍요속에 빈곤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설교들이 진심으로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면 그야말로 '풍요속에 풍요'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정작 그 수많은 설교들은 성경의 본래적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음성만을 들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풍요로운 설교 속에서 선지자와 사도들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도 발견할 수 없는 빈곤의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풍요속에 빈곤'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말씀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자꾸 개인적인 어떤 이득을 얻어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발각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작아지고 나중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란 그릇의 뚜껑을 열면 그 안에는 달고 맛있는 사탕이 가득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서 성경안에서 달고 맛있는 사탕을 끄집어 내주기에 애를 쓰다보니 교회에서 성경의 권위란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주장이 너무 무리한 주장일까요?

시 119:103절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성경안에는 꿀보다 더 단맛의 말씀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104절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란 말씀을 보면 결국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 죄를 미워하게 하는 명철을 가져다준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인간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주체는 성령이며, 해석하는 주체도 성령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도구로서 등장할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많은 신학적인 학설이 있습니다. 기계적 영감설, 축자영감설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 지금 저는 여러분들과 성경의 기록자에 대한 신학적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이러한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의 잘못은 설교의 잘못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통을 주장하는 칼빈주의라는 교회라면,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지만 인간이 자기의 학식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인간이 자기 학식, 자기 경험, 자기 상식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의 지혜로 기록하였다는 것은 성령은 불러주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썼다거나, 가만히 묵상하고 있는데 써야할 내용이 생각나도록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자가 자기가 보고들은 모든 사건의 하나하나를 하나님 편에 서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마다 똑같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같지 않다는 것은 성령이 다르다거나, 서로 틀린 것을 깨닫게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어떤 사건을 하나님편에 서서 바라볼 때 어떤 저자는 '예수는 메시야다'는 것을 깨달은 반면, 또 다른 저자는 '십자가를 믿는 것은 고난이다'는 것으로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매주일 마태복음을 설교하고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가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강도도 예수님을 욕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한편 강도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하는데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예를 든 것으로 이러한 차이점은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음서가 단지 예수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것이라면 모든 복음서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저자들마다 이야기하고 싶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고,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한 사건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마태는 예수님만이 구약에서부터 언약된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임을 변증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가는 복음을 소개하면서 고난은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성취되어짐으로 온 인류에게 미치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신학적인 성경 해석의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여러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왜 교회가 풍요속에 빈곤이 되었는가?'를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저자와 같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자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의 말이 나오기 때문에 설교는 많으나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설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그때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참으로 우리의 빈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말씀은 풍요로우나 그 말씀 속에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는 빈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혹시 이런 상황이 아닙니까? 십자가는 풍요로운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듯,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는 삶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는 십자가를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잘안다'고 자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는 일에 너무나 빈곤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교회보다는 발전하고 성공하는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삶속에서 주어지는 기쁨이나 위로보다는 부요와 물질 속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을 더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꼭 물질을 멀리하고, 교회 부흥을 멀리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물질을 멀리한다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교회 부흥을 멀리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위로와 기쁨을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사느냐 입니다. 만약 십자가로 인해서 주어지는 기쁨을 안다면 물질에서, 교회부흥에서 기쁨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린 지금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져있는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너무나 익숙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 대해서는 기독교이기 때문에 의례히 해야하는 말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식상해져 있다보니 십자가에 대해서 날마다 새로움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말은 풍성한데 십자가에 대한 새로움은 너무나 빈곤합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도 빈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보셔야 합니다.

46절에 보면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이 외침은 우리가 외쳐야 할 외침인 것을 아십니까? 마지막때 우리들이 심판으로 버림받을 때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우리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외침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당할 버림받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주님이 어떤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외침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께 했던 외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부터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통해서 오실 왕이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으시게 되는가를 다윗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까지 낮아지셨습니까? 벌레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벌레로 취급받는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벌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아십니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내가 벌레 같은 인간인데 그 자리에까지 예수님을 밀어 넣으시고, 한분의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명으로 초청 받게 된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진심으로 아는 분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해도 이 사랑만으로 배부르며, 세상일이 괴롭다고 해도 이 사랑 때문에 노래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벌레 같은 인간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지렁이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벌레로 취급하는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마음상해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도 없을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삶에 너무나 빈곤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자기 자랑과, 욕심과, 비교와, 시기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새사람되게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벌레로 취급받는 그 자리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남이 여러분을 욕하고 괴롭힌다고 고통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과연 어떠할까요.

주님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당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온갖 정성으로 길렀는데 나중에 커서 자신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부모를 멀리하고 부모에게 칼을 들이댄다면 부모로서 그 고통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자식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안다면 그리고 내 삶에 받아들였다면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희생만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는 너무나 빈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1절과 52절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일어난 현상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일어난 현상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 휘장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인간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논 장치입니다. 휘장은 법궤가 있는 거룩한 곳과 법궤가 없는 곳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있는 곳은 생명이 있습니다. 매년 한번씩 대속죄일에 피가 뿌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한 그곳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를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법궤에 피뿌림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은 온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거룩한 장소가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디든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누구든 이것을 외면할 때는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지성소는 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피없이 들어온 자는 죽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외면하고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세상을 사는 자는 결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이것은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이 땅의 세상은 다 깨어지고 사라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사는 것만이 망하지 않고 새로운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셋째는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무덤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죽음이 있는 이상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그 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무덤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너무나 메마른 마음으로 교회를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풍요로운 복에 대해서 풍요로운 마음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는 메마르고 빈곤한 마음이고, 반대로 세상에 대해서는 갈급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주님을 찾아 나오고 십자가를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눈에 보여지는 것들이 그렇게 좋습니까? 돈이 손에 쥐어질 때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든든해집니까? 예 좋습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때에도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기분 좋게 하고 마음 든든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오히려 그것들이 여러분을 망하는 길로 끌고 갈 것입니다.

세상은 지성소입니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판단하시는것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옳은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았느냐를 보실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풍요로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