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이 이 시간 여러분의 힘으로 존재하십니까?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이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힘이나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그런 믿음으로 삽니까?
여러분, 신자가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은 많이 하고 살았지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힘이었습니다. 주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이 믿음의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해왔습니다. 내가 주님께 소홀해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에 돈이 말라가고 저금통장에 돈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장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마음이 복잡해서 교회에 나갈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좋지 않아서 교회에 나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교회로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의 취미생활이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미생활이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기분이 좋고, 세상에서 복잡한 일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마는 그런 정도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내 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좌우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결단과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다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조차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감사와 은혜의 기회를 한낱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 때문에 잃어버린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돈걱정 때문에 은혜와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빈곤하고 메마른 신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웃고, 하는 일이 잘돼야 웃는 그런 웃음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서는 그런 웃음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웃음, 주님 때문에 기분 좋은 웃음, 그런 웃음들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과는 상관없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 주님은 죽지 않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그 믿음 때문에 여유 있게 웃어 보일 수 있는 그것이 참으로 주님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일 때문에 은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감정에 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자는 감정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감정이 믿음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내 감정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의 힘, 또는 신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능력에 대한 것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능력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고 누구든지 능력을 받은 자는 큰 힘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성령께서 능력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내가 그 능력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능력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능력은 내가 개발했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능력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그 능력은 내가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즉 능력을 자기 소유화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령께서 주신 능력이지만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내가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능력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의 능력은 단지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힘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기가 좀 지나쳐 보입니까?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능력이라는 말까지 쓰느냐는 생각이 듭니까? 하지만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은 씨름판의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돈많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은 크나큰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라면 능력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이 아니라 능력이 있으신 분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그분의 능력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흔히 쓰는 '불가능이 없다'라는 말이나 '하면 된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불가능이 없다는 것이나 하면 된다는 말은 인간의 고집이고 오기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있습니다. 오기 고집 가지고도 하지 못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세상이 발전해서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해도 최후까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엄청난 능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정작 그 능력 안에 있는 신자가 능력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능력을 물리적인 힘이나 어떤 재주로 생각하는 버릇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능력 안에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뜻안에서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신자된 우리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맡기면 '나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일이든 무슨 일이든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야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즉 결과가 중요한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주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신앙안에서의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이건 모든 일에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사 일을 하든 교사 일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를 맡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 일을 해서 주일학교가 부흥하도록 만들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줘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사 일을 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교사로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주님을 따르는 그 모습도 보여줄 힘이 없는데요' 예,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줄 재간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약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주님이 도우셔서 십자가에 길에서 주님을 따르는 그 모습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능력 안에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이러한 능력이 점차 보여지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만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능력있는 신자가 점차 희박해져 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죽으시고 나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새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고,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단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믿었던 스승이 적들의 손에 의해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소망도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지 예수님의 장사나 잘 지내줌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장사 지냈다는 것은 이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 즉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의지할 수도, 힘이 될 수도 없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왜 신앙에 힘이 없습니까?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 허둥대고 낙심하는 모습만 보여주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주님,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살아 계셔서 이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아는 신자가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있다면 주님이 지금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떤 모습을 보이시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신자라면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 안에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아예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부활을 막아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보고자 무덤을 파숫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있던 세상, 부활을 막아보려고 애를 쓴 세상, 그 세상에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만의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무덤에서 사흘을 기다리셨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바로 부활하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무덤에서 계셨던 사흘의 기간은 세상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막으려고 했던 인간의 죄를 보여주는 기간입니다. 그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정복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그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정복되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하나하나 주님께 의해서 정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로 끝나버리지 않고 그 죄속에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내 죄가 정복되어지고 다스려짐으로 인해서 이제는 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있는 신자입니다. 여러분 능력있는 신자입니까?
우리가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나는 부족해서 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나는 못한다'는 생각 대신에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져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한다'는 것이나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나 둘다 동일하게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힘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해보려는 사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끌고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갑니까?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힘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방지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부활을 막아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쓸데없는 일이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의 주님이 되시고 능력의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주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고, 세상에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낙심하고 슬퍼하는 그런 인간임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것도 주님의 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그것만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 나오고, 주를 믿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모든 일들을 나의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감사 대신에 자랑이 나오고, 겸손 대신에 교만이 나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해도 절대로 능력이라고 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은 살아계시는 주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버린 주님입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일에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한숨 쉬면서 살아간다면 주님은 여러분들에게는 죽어 계시는 분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주님을 추모하는 있는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힘을 공급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속에서도 걱정과 한숨보다는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능력으로 주님의 제자된 모습이 보여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의 능력이 주어졌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의 능력으로 살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의 능력은 부활의 주님을 잊어버리도록 합니다. 하늘의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에 매여서 하늘의 소망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능력이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빌 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있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합니다. 즉 주님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궁핍이나 풍부에서 항상 자족하는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으로 인해서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천하다고 낙심하지 않고, 풍부하다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주님안에서 이러한 능력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