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금식(마 6:16-18) - 9강

성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의 형편이나 마음은 전혀 관심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자기의 모든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겠다고 따라 오는 자만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보면 엄청난 독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 요구사항이 독선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로서 나의 생각과 의도대로 이 땅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욕망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을 꺽어버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달갑지 않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독선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취한 행동은 하나님과의 타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이 욕망과 섞어비린 것입니다. 즉 인간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인간의 종교행위라고 말합니다. 종교행위에는 신의 요구를 따르면서도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자의 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마 6장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장을 보면 종교행위가 나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나오는데 이 세 가지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 보탠다면 십일조입니다. 따라서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는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종교행위였던 것입니다. 이 행위는 오늘날에도 신자들에게 중요한 행위로 되어 있습니다. 이 4가지만 잘한다며 그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떠받들여지게 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금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금식과 바른 금식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할 때 자신이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이웃들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 세수를 안했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일부러 초췌한 모습을 하였습니다.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할 때 그 칭찬이 금식을 하는 그들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금식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금식을 강조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나면 기고만장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교인들도 40일 금식기도한 목사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애합니다. 40일 금식기도라는 것을 하고 나면 자신에게 어떤 큰 능력이 주어질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주님 앞에 합당한 금식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금식했고, 또는 국가적으로 금식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금식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뭔가 잘못됨을 발견했을 때 하는 금식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금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4일 금식을 하였습니다. 신 9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40일 금식기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잇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했거나 회개의 표현으로 금식한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금식들이 말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금식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지 못하고 잘못되고 있을 때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바로 고쳐나가라는 것이 바로 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땅에 세워나가야 할 우리가 그 뜻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면 분명히 우리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미움과 경쟁으로 채워져가고 자꾸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금식자체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금식을 밥을 먹지 않는 것이 금식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 58:6,7을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금식을 단지 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서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을 금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금식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으로 인해서 잘못되었는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합니다. 자기 몸에 대한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음식을 먹지 않으므로 자기 몸에 대한 관심을 끊는 다는 것이고 또한 나는 세상의 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그 금식이 곧 행동으로 드러나는 데 그것은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에만 관심을 두고, 자기 몸만 귀하게 여길 때는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에 것에 소망을 버리면 버릴수록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된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자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인데 내 몸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금식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행위는 우리를 신자되게 만드는 방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됨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자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 회개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며 나누는 삶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는 것이 금식입니다. 때문에 금식이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나 어떤 능력을 받기 위해서나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 9:15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금식하는 날에 금식하지 않는 것을 트집을 잡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끁므하시면서 금식해야 할 때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금식할 때는 신랑을 빼앗길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빼앗겨서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기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할 때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로 인해서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신앙을 빼앗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앙 생활은 정상적으로 되지 못합니다. 교회 나오는 것도 기쁨이 되지 못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고 말씀을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럴 때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싶어서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고 자신에 대해서 한심해하면서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기쁨을 누려보고 싶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간을 정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십시오. 기간을 정하면 다시금 금식이라는 종교행위에 매이게 됩니다. 자유롭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날 때 금식을 그치면 됩니다. 금식은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어떤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음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소원이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에 실려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금식의 행위가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밀한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금식을 과시하고자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만을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했을 때 이미 그것으로 모든 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은밀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된 하나님 나라를 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