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민 16:31-40 심판 97.7.27

지난 금요일 저녁에 TV에서 '자연의 분노'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자연의 재해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룬 내용입니다. 회오리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그 자리에는 집도 논도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집이라도 힘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폭풍이 지나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폭풍과 함께 해일이 밀려오자 도시가 물에 잠겨 버립니다. 특히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리는 용암이 한마을 전체를 덮어버리고 이러한 자연재해로 인해서 수만명,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는 내용들은 참혹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고작 재해의 징조를 미리 알아내고 대피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의 힘은 재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재해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의 힘이라고 하고 자연의 분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찌 자연의 힘이겠습니까? 바로 온 우주를 다루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TV를 보면서 노아 때에 일어났던 홍수 심판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홍수 심판에 대한 얘기를 들으실 때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참혹함을 느끼십니까? 온 세상이 물에 잠겨 버리는 홍수 심판은 여러분이 눈으로 보았거나 겪었던 어떤 자연의 재해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홍수 심판을 까마득한 아주 먼 옛날의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우습게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유년부들에게 해주는 옛날 성경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웃으면서 들었고 재미있게만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에게는 홍수 심판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를 찾아다니는 흥밋거리, 연구거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노아 때 사람들이 당한 그 참혹함은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노아 홍수를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 것일까요? 그렇다면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너무 무시하고 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내 몸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심판을 하나님의 농담 정도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온 시뻘건 용암들이 온 도시를 뒤덮으면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태워버리는 장면들은 마치 마지막 때의 불심판을 연상케 했습니다. 그날 TV를 통해서 방영되는 내용들은 자연을 통해서 심판을 외치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으로 들려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에 갇혀 지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마음에 두자는 것은 과연 마지막때 누가 살아남는 자가 되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고라의 반역을 말씀드렸습니다. 고라는 모세에게 '우리도 거룩하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너희만 지도자의 일을 하느냐'고 대항했습니다. 고라는 자신들은 당연히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지위나 눈독들이고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편안한 삶을 살기에만 바쁜 그들이 스스로를 신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또 홍해를 건넌 체험도 했고,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성막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라 무리에게 모세는 과연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아론과 고라 무리 모두가 각기 향을 피운 향로를 가지고 회막문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멸시한 자는 땅이 입을 열어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합니다(29,30). 모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고라의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물건까지 다 삼켜 버립니다(32,33). 또한 고라를 추종했던 250명의 족장은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워버렸습니다(34,35). 여러분, 이렇게 무섭고 참혹한 심판의 이야기를 그저 담담하게 들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옛날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고라의 이야기는 마지막 때에 심판으로 소멸되고 음부로 들어갈 자는 어떤 사람이냐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누가 심판으로 들어갈 자이고 누가 남을 자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고라같이 하면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고라같이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고라같이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도자에게 대항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혹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목사들은 교회의 성도들이 함부로 목사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고라 일당을 보십시오. 지도자인 모세에게 대항하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에게 대항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대항하면 그 죄를 하나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말로 성도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고라는 모세에게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를 멸시한 것으로 말합니다. 30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말대로 땅을 열어서 그들을 삼킴으로 고라 일당이 여호와를 멸시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모세에게 대항한 것이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 됩니까? 그것은 모세가 중보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과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중간에 세우신 분을 말합니다. 물론 그분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시지만 지금 본문에서는 모세가 그 역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13-18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으로 인해서 그들을 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로 인해서 그 멸망을 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가 중보자의 위치에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14:19절에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라 일당이 모세를 대항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자기들도 모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모세의 자리를 자기들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얼마든지 모세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세우신 중보자 때문에 살고 있음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하셔서 고라와 그 식구들을 삼켜버리게 하시고 그 일당들은 불로 소멸시켜 버린 것은 한마디로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노아 홍수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끝나자 노아는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사람의 죄 때문에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재난으로 죽는다면 살아있는 나나 죽은 그 사람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중보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보자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라도 자신이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 자기의 존재성을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세상이 보존되는 것은 정결한 존재의 희생 때문입니다. 신자가 해야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무시하는 자는 땅위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고라 일당이 멸망당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38절에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고라 일당을 태워죽인 향로를 쳐서 편철을 만들어서 그 편철로 제단을 싸라고 명하십니다. 편철이란 함석같이 납작하게 편 쇠를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향로가 편철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마다 제단을 싸고 있는 편철로 변한 향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편철을 볼 때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에 향로로 편철을 만드신 이유가 그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표는 십자가입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이 땅에 영광의 모습으로 오시지 못하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은혜를 은혜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주를 바라보면서 저 피는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흘려지는 피임을 아는 순간 진짜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을 자는 바로 이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십니까? 그 부끄러움 속에서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욕심 속에서 살아가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자인지, 내가 얼마나 은혜를 무시하며 사는 자인지 여러분의 삶속에서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잘못했으니까 심판 받는구나'로 끝나면 아직 뭔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라 일당의 심판 속에서 바로 나 자신이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할 존재이고 향로의 불에 의해서 타죽어야 할 악한 존재인데 중보자의 희생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까지 깨달을 때 그 사람이 곧 은혜를 아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세상을 살아갈 때 결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고라와 같이 나도 거룩하고 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죽음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른다면 인간에게서 나올 것은 원망이요 불평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고라 일당의 심판을 보고서도 은혜를 알지 못한 자의 입에서는 원망만 나옵니다. 41절부터 보면 모세의 말에 의해서 고라 일당의 장막에서 떠남으로 심판을 면하게 회중들이 다시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의 내용은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 너희들 때문에 저사람들이 죽었다는 원망입니다. 심판받아 죽은 자들을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우깁니다. 철저하게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생각과 고집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과 똑같이 모세를 반역합니다. 그들의 눈으로 고라 일당의 심판을 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에게 염병이 발생합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에 향을 피워서 백성을 위해서 속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론이 산자와 죽은 자의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이 그치게 됩니다. 결국 또 다시 그들은 중보자의 은혜로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죄인인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중보자의 희생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마지막때 남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아 음부에 빠졌다면 고라같이 하는 자는 틀림없이 마지막때 음부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만약 고라 일당의 심판이나 이스라엘이 염병이 들어서 14,700명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모세에게 반항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신 것을 이해하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심판 당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심하다'는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심판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서 여러분을 은혜로 붙들고 계시는 중보자의 피흘리시는 희생의 손길을 가슴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부끄러움을 찾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고 죽여도 할말없는 그런 존재가 이렇게 주님께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아니 중보자의 은혜를 아신다면 굳이 제가 감사하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자연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간도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참으로 복된 신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도 누릴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신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힘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