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민 31:13-20 책망 97.12.21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가운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문제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믿는 자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가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세상이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 할 수 있는 신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무엇에 대해서 주려하고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설교할 때마다 느끼는 갈등은 과연 이 자리에 의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주려하는 분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교회로 모인 분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갈등을 많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의를 전함으로서 의에 대해서 주려하고 목말라하는 심령이 배부름을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주는 것인데 의에 대해서 목말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를 전한다고 해도 그의 의는 여러분들의 귓가에서 스쳐 사라져버리는 공허한 말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닌 말을 전한다는 것이나 내 관심사가 아닌 말을 40분씩이나 앉아서 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서로에게 고통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십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설교하는 목사가 생각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생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받는 저와 여러분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시간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대충 교회 다니고 대충 믿어서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버리시고, 오직 의에 대해서 주려하고 의 때문에 애통해하는 그런 심령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찾아 나오는 신자의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것은 신자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긴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은 전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아마 요즘같이 경제가 흔들리고 불안하고 모든 것이 어려운 때에,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다는 것은 절실하게 느끼실지 몰라도 신앙생활이 전쟁이라는 느낌은 별로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싸움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적과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리품이란 싸움의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신자들은 싸움은 없이 단지 전리품에만 눈독을 들이고 손을 벌리고 하나님을 찾는 형편입니다.

신자가 해야할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쟁은 모두 자기를 위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이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인 것입니다. 그 전쟁에 군사로 나가야 할 사람이 신자들입니다. 3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사람을 택하여 싸움에 나갈 준비를 시키라고 합니다. 택함 받은 자의 역할은 싸움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싸워서 우리를 천국보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군사로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단지 때가 되면 제사나 드리고 절기나 지키다가 천국 가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을 교회로 부르신 것도 주일 되면 예배나 드리고 적당히 봉사나 하다가 천국보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군사로서 부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일은 싸우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적은 미디안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지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원수라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도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라고 말씀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했던 나라입니다(25:1-9). 즉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끔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미디안이 원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길로 나가게끔 하는 그 무엇이 원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단지 미디안이란 나라 자체가 이스라엘의 원수라면 오늘날 새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교회된 신자들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어떤 나라가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까?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하나님이 싸우셨던 대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원수가 되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바로의 사고방식 자체가 원수가 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기를 청했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데'라고 하면서 거절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10재앙을 내리시면서 애굽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 갚음을 그들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어떤 국가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고방식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된 사고방식으로 존재할 때 그자는 이미 하나님의 원수된 것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점을 우리가 생각할 때 바로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미디안이라는 족속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반대하고 무시하고 우리를 죄악으로 끌어가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때 오늘날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을 안믿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신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매우 심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은 여호와란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굽은 요셉 때문에 여호와란 신의 이름을 충분히 듣고 살아온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여호와가 누군관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애굽이 지금처럼 번성된 것이 요셉이 믿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무시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애굽이 강성한 것은 나의 능력과 지도력 때문이지 여호와란 신의 힘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는 얼마든지 여호와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비관적인 모습만 보여지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독단적인 생각이고 판단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과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는 삶이 과연 우리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은 헛된 것이고 썩어질 것이니까 세상것 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고 말씀하지만 과연 우리가 세상 보지 않고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여호와가 누군관대'라고 외치는 바로의 목소리가 숨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반대된 쪽으로 끌어가고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섬기도록 하는 미디안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내속에 자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생각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원수갚음은 바로 나를 향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실 때 '너희가 왜 나를 모르느냐'는 것 때문에 애굽을 치신 것 같이 지금도 그 일을 이 땅에서 반복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을 치셨던 그 심정을 우리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우리는 '왜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는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작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부터 하나님의 심정은 외면해 버리고 모두가 자기 심정을 앞세우고 자기 일을 앞세우다 보니까 의에 주려하고 목말라하기는커녕 세상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살아가는 모습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가 군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여호와가 누군관대'라는 바로의 사상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호와가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른 자는 심판 받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음을 전해야 할 사람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드려야 할 군사로서의 삶을 내가 방해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바로의 목소리가 살아있어서 군사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책망을 받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15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가지고 당당하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책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말할 때 기도하지 않은 것, 헌금 안한 것, 주일에 예배 빠진 것, 단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책망하시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 위해서 오늘 이스라엘 군사들이 모세와 엘르아살에게 책망을 듣는 것을 자세히 알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르아살이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은 여자들을 살려둔 것 때문입니다. 여자를 살려둔 것을 책망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25장에 있었던 사건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여인과 음행 함으로서 염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죽임으로서 염병이 그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행동을 가리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치라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비느하스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가운데 살아갈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치고 나서 여자를 살려고 데리고 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들로 하여금 음행 하게 하고 우상숭배하게 해서 염병에 걸려서 24,000명이 죽었던 하나님의 징계를 잊어버린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미디안 사람을 쳐서 죽이라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서는 이해가 안될 명령이고, 오히려 다 치지 않고 남겨서 데려온 것이 더 인간적이고 사랑이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미디안인을 다 죽이기를 원하십니까? 이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하나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성경을 써라 했다면 모세와 엘르아살이 여자를 살려온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부분을 삭제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만 아니라 많은 부분을 삭제해 버리고 좀더 아름다운 내용으로 가득찬 성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과 바램을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과 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 쳐서 진멸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자들을 남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것, 좋은 것은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마음을 앞세워서 행동한 것입니다.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미디안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도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미디안 때문에 음행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까? 미디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있고 오히려 미디안을 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 멋대로 여자를 살려서 데려올 수가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미디안을 죽이면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죽어야 할 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한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 받아 죽어야 할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를 보여주어야 할 신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여자를 살려서 데리고 온 이스라엘처럼 살아갑니다. 자기편에서는 잘한 일이고 칭찬들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책망할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며 교만해져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살려주신 것은 이 세상에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라는 것 때문입니다. 심판 속에서 은혜로 살아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에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재현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를 통해서 심판과 부활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 치우쳐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 쳐서 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좋고 이익이 되는 것은 남기고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화자찬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를 향해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자를 죽이라는 것은 남자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사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를 아는 여자도 죽이라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알았다는 것은 남자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남김없이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이 나쁘다는 것 잘압니다. 세상이 망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도 돈없으면 못살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필요하게 여겨지고 이익이 되는 것들은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하고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심판과 부활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심판 받을 것에는 눈돌리지 않고 미련 두지 않고, '심판 받아 죽어야 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은혜만 있으면 족하다'고 하면서 심판과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군사로 살아가는 전쟁입니다.

심판 속에서 무엇만이 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22,23절의 말씀은 누가 심판을 지날 수 있는 깨끗한 인간인가를 말합니다. 불속에서 견디는 것은 물을 지남으로서 깨끗케 되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심판 받을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한 자가 되었음을 알 때 불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지 결코 땅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 살아갑시다. 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원수된 것만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