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1  만국에 대한 심판


<본문>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이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혔던 자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네겝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옵 1:15-21)


 


<설교>


에서의 후손인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방인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침략한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이 행한 그들의 포학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틈을 타 성에 들어가 재물에 손을 대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을 막은 것이 에돔의 포학이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에돔을 향한 심판이 이제는 만국에 대한 심판으로 확대되어 선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돔의 심판이 에돔으로 끝나지 않고 만국으로 확대된 것은 만국이 에돔과 같은 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야곱에 대한 포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돔이 야곱에게 행한 포학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만국 전부가 에돔처럼 야곱에게 포학을 행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돔이 아닌 이방인은 사실 야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내용을 문자대로 해석을 하게 되면 만국의 누구든 야곱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포학을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이스라엘은 혈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드러난 내용입니다. 즉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에돔이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에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이 있습니다. 창 12:2-3절을 보면 하나님은 복과 저주의 중심에 아브라함을 두셨습니다. 누구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시겠다는 것이 복과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복과 저주를 행하십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복과 저주에 대한 약속을 무시하고 인간이 세운 규정대로 시행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에 관심을 두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복과 저주의 중심에 아브라함을 두시고 그 원칙대로 시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을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을 축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을 축복해야 한다면 오늘 우리는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지만 정작 아브라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인해서 바로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했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자신의 뜻대로 사라의 여종과 결혼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계속 관여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협력을 할 자질이 있다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도 한 몫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이 보여준 것은 훼방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입과 관여로 말미암아 약속이 성취된다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통하여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해 성취되고 인간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관여하심의 삶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듯 신자를 인도하시고 항상 하나님을 훼방하는 우리를 다스리면서 결국 성취된 약속 안에서 구원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는 때로는 실패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헛된 것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면서 참된 것을 소망하는 신자로 굳게 세우기 위해 잘라낼 것을 잘라내시고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리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비록 하나님의 인도와 지키심 아래 존재하지만 얼마든지 낮아지고 비참해지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낮아지고 비참한 자리에 대한 세상의 평가입니다. 세상은 낮아지고 비참한 자리는 무시합니다. 낮아지고 비참한 자리 역시 하나님의 인도와 지키심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의 간섭과 지키심의 결과는 높아짐이고 영광이라는 것이 세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약자는 무시 받는 자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어떻게 간섭하는가와 상관없이 약자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실패와 무너짐의 자리에 밀어 넣으시면서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게 하시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이유라면 약자라는 이유로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이야 말로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 확실한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낮은 자로 오셨고 비참한 길을 가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고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믿고 의지하는 힘이 참된 힘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했습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줄 영웅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 고난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는 예수님은 미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웃의 실패를 즐거워 할 수 없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이웃의 실패가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실패를 통해서 그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이웃의 실패를 즐거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행하심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소망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에돔이 예루살렘의 고통을 기뻐하고 즐기면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관여하시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에 에돔을 심판하시고, 그와 같은 원칙으로 만국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시온산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에 위치한 법궤에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죄가 용서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자비하심입니다. 따라서 피할 자가 있을 거라는 말씀은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바로 긍휼과 자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높이는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용서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얼마든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살아가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받은 것으로 주를 높이고 찬송하게 됩니다. 이들이 복의 근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축복하는 사람들이고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