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베드로전서 1:1-2  삶의 내용물

 

<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1-2)



<설교>

대개 보면 신자의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으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삶을 그런 방향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힘으로 넘지 못할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는 신자의 삶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서에서는 신자의 삶을 위해 뭔가 실천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 신자를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의 삶이라는 것은, 신자가 실천하는 좋은 행실이 아니라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도 실천할 수 있고, 보여지는 것이라면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신자의 실천을 보면서 ‘믿는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늘의 삶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하늘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내고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의 삶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삶은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이란 인간의 의지에 의한 행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실천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을 하나님의 선물의 결과물로 바라본다면 내게서부터 나오는 나의 행함이 아니기에 그것을 경쟁과 자랑의 도구로 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입니다. ‘내가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채워 가신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라고 생각하신다면 아직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그네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그네란 본향을 소망하면서 자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면서, 본향이라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나그네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입니까? 아니면 나의 행함입니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채워 가시는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얻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나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가능한 은총일 뿐입니다. 때문에 피 뿌림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신자의 삶에 채워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피 뿌림이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피를 뿌렸을 때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유는 피를 보고 그 집을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피 뿌림을 얻었다는 것은 ‘너는 죽었다’는 것을 선언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은 나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는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앞에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자일 때 주님의 십자가가 놀라운 은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죽은 나에게서는 선한 것, 의로운 것은 나올 수가 없는데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고, 본향을 소망하게 되고, 십자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신   삶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다스리고 징계하시고 고쳐 가시면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부르셔서 살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신자의 삶은 내용은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것과 같은 본질의 것으로 채워집니다. 골 1: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덜 받으신 고난이 있어서 그것을 사도가 마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어질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난을 우리의 육체, 즉 삶에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의 삶에 채워서 계속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스스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삶을 요구한다면 신자라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임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난은 육체적 괴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고난은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을 보지 않고 전혀 다른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이 이미 고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삶을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간섭과 다르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길로 부름 받았습니다. 신자를 예수의 증인되게 하시겠다는 것도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삶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고 신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