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베드로전서 1:3-4  찬송하리로디

 

<본문>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3-4)



<설교>

세상은 인간의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죽음은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생은 허무하니까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 다 포기하고 갖고 있는 것도 다 버려 버리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까요?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가 있고,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인생을 남기기 않기 위해서 세상에 보람된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내가 죽은 뒤에 세상이 자신의 업적을 두고 칭송을 한다고 해서 죽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생은 죽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인생은 죽는다’는 것으로 끝이지만 신자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는 말씀에 의해서 죽은 나를 살리신 분을 향한 소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죽음에서 인생의 허무를 생각할 뿐이지만, 신자에게는 나를 살리신 분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허무도 없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죽음 위에 놓인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 위에 놓인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죽음을 이길 수 없고 피할 수는 없지만 내 편에 서서 죽음을 이기신 분을 알고 있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나를 살리신 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감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나그네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자를 나그네로 말하는 것은, 떠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돌이는 돌아갈 곳이 없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떠돌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라고 말하면 떠돌이라는 시각에서 왠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떠올리게 되지만, 신자는 쓸쓸하게 나그네 설움만 부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나그네에게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그네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있고 기쁨이 있는 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찬송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나그네인 신자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신자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나그네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그네란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본향이 아무에게나 주어집니까?


나그네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택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한 죄가 용서되고 예수님에 의에 참여된 된 자로서 거룩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산 소망입니다. 나그네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아는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안에서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찬송을 자기 기분이나 감정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찬송도 기분 좋을 때 부르는 노래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이기에 유행가 대신 찬송을 부름으로써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찬송은 내 기분이나 감정, 내 형편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찬송은 노래가 아닙니다. 때문에 찬송에서 중요한 것은 잘 불렀느냐 못 불렀느냐가 아닙니다. 박자 음정이 맞았느냐 틀렸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찬송의 내용입니다.


3-4절을 다시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찬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일이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신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들이 과연 기쁨으로 다가옵니까?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찬송하게 됩니까?


시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일들은 모두 세상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갈 하늘나라와 연관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도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신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긍휼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죽은 자는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자의 불쌍함입니다. 영원한 멸망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죽음에서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운명에 참여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죽음은 곧 영원한 나라, 본향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그네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닐 수 없기에 ‘찬송하리로다’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어 놓으면 환영받지 못하고 팽개침을 받고 개도 물어가지 않을 것에 불과한데, 신자에게는 너무 큰 기쁨이 되어서 찬송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습니까? 세상은 하늘에 대한 것을 막연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세상이 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바로 거듭난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얻는 것도 하늘의 기쁨에 견줄바가 못됨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늘의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뻐하고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찬송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찬송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도 아니고 좋은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총의 일들 때문에 찬송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보화를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망에서 건져내어서 생명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도께도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에게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것만 바라보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려고만 하는 미련한 우리들에게 양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조차도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항상 세상을 향할 뿐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들인데 이러한 우리들의 욕망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이 양보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내가 원한 대로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것에도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에 양보하신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는 자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내가 원한 대로 해주신다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을 바라보고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