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베드로전서 1:5-7  믿음의 시련

 

<본문>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5-7)



<설교>

신자에게 있어서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는 선물로 인해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삶의 모든 것은 기쁘고 좋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삶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나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삶을 주셨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내용물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내용물이 담겨 있지 않은 삶에 대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감사도 물론 없습니다. 대신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 달라는 마음으로만 예수님을 찾을 뿐입니다.


이런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예수님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기에, 한마디로 삶의 목표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에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산가들이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험한 등반이라고 해서 기피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고 나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급박한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또는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전문 등반가들의 하나같은 얘기입니다.


어떤 유명한 등산가는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거기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등산가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면 신자는 예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가는 길이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라면 그 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른 길로 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등산가의 눈에 산만 보인다면 신자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이러한 삶의 길을 소원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고난이라는 것이 걸림돌도 방해물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이 좋아 산을 가는 사람들에게 빙벽이든 바위든 방해물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선물하신 삶의 내용물이 고난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선물 안에서 신자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시험이나 시련은 모든 인간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시련이나 시험으로 인해서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근심은 잠깐 동안의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쁨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험과 시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꼭 시험과 시련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까? 남들보다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그 대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간다는 것은 죽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이고 죄에 대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서는 인간의 공로가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공로로 여겼던 모든 것, 즉 자신에게서 나왔던 모든 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었을 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시험의 의미를 알았기에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결국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증표가 기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싫으시느냐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시련은 진노도 심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시험이나 시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준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험과 시련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오셨을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과 시련을 동원해서까지 징계하고 가르쳐야 겨우 예수님께 눈을 두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우리를 붙드시고 절대로 놓지 않으시고 시험과 시련을 가게 하시면서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를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함을 안다면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시련과 시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과 시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을 하나님이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골라서 채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으로 인해 원망과 불평과 실망에 주저앉을 뿐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시련을 환경적 고생이나 고통의 의미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자에게는 시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시련이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의 붙드심과 계획안에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일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