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베드로전서 1:8-12  믿음의 결국

 

<본문>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8-12)



<설교>

여러분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여러분을 붙들어 어디로 끌어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개는 자기의 믿음으로 천국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의 믿음으로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라면, 과연 천국에 도달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믿음으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맛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절감하는 것이 믿음의 실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의 삶의 근거를 ‘행함’에 두고 있다면, 자신의 실천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함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가령 매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았는데,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느냐?’라는 반문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 나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행함을 부인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믿음이 좋아서라는 생각은 오히려 믿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믿음에 이끌려 어디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이란 믿음에 이끌려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즉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가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시험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련과 시험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시련과 시험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대접하실까요? 택한 백성이라면, 사랑하는 자라면 고통이 있는 시련의 길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합당하지 오히려 시련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시련이 있으면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해서 하나님이 시련을 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갔던 사도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했습니까?


사실 신자에게 고통일 수밖에 없는 시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온전한 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시련이 믿음을 연단하여 참으로 귀한 것을 얻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시련에서도 근신하며 오히려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시련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에 대해서 외면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버리기는 싫지만 시련 또한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시련을 얘기하지 않는 믿음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없고 축복만 있는 믿음 안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결국을 영혼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믿음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생각하는 것은 영혼 구원일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할 뿐, 믿음이 우리를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도 택한 자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해도 그런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자신이 시련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말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 정도일 뿐입니다. 즉 시련으로 인해 구겨질 수 있는 자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으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행 2:21). 그래서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주의 이름이라면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원한다는 것은 주님의 모든 삶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주님의 삶과 일치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지 세상에서 남들처럼 좋은 것 많은 것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여’라는 말은 하면서도 참된 의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좋지만 주님의 삶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기에 결국 영혼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십니까? 시련과 시험을 동원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를 향하게 합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게 하시고 참된 것을 향한 마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채워진 주님의 삶이 결코 고생의 차원이 아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보지 못하나 믿으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에 붙들려 이러한 길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10-12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구약때 활동한 선지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언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즉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오래전부터, 엄밀히 말하면 창세전부터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임하는 시련도 자기 백성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구원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마음먹고 교회를 다녀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계속되어진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시련도 그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일이기에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찬송과 기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