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베드로전서 1:13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본문>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베드로전서 1:13)



<설교>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 신자에게 주어질 은혜가 있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완전한 구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하늘나라에 완전히 거하게 되는 구원의 은혜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바라는 자로서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시련 속에 있었습니다. 고초를 겪으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가져오실 은혜는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시련과 고난의 눈물을 씻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의 마음은 시련을 겪는 신자들이 시련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그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다시 오실 주님에게로 향해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를 향한 사도의 참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사도의 마음을 안다면 엉뚱한 욕심을 내보일 수가 없습니다. 형제 관계에 있는 신자가 아무런 시련과 고초를 겪지 않고 편히 살기를 원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마음을 따라 일어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 곧 신자입니다. 시련이 없기를 원한다고 해서 시련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라면 시련에 있는 형제의 마음이 주님이 가져오실 큰 은혜를 향함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허리를 동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허리에 띠를 띠는 것으로 길을 떠나는 자의 준비입니다. 출 12:11절의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음식을 먹으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먹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모습으로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길을 떠날 시각이 급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애굽 땅을 떠나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삶은 이제는 끝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월절 음식을 특이한 모습으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유월절에 먹은 양은 그냥 양이 아니라 희생의 양입니다. 즉 유월절의 양은 양의 죽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죽음을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양을 먹으면서 자신의 죽음까지 인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죽음입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애굽 땅에서의 삶은 이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삶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떠나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생활하는 터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마음은 세상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세상에서 떠난 자로 보고 자신을 살피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신자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두어야 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를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거할 곳이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집도 자신이 거할 곳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육신이 머무는 공간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서 좀 더 좋은 집에 머물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좀 더 편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욕심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오실 은혜의 귀함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그 마음이 애굽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애굽에 있기 때문에 고난이나 시련에 대해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이나 시련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고난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시고 소망하게 하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장차 주어질 영광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소망하게 됨으로써 신자의 마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아십니까? 그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고 살아갑니까? 주님이 가져올 은혜를 소망한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이미 세상에서 떠났음을 뜻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그 날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시련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라는 말을 합니다. 듣기에는 아주 경우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받았으니 보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바른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무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자는 받은 은혜를 갚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를 알았기에 예수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더욱 기다리고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맛을 알았기에 은혜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를 흩어진 나그네로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신자에 대한 사도의 말을 보면 신자는 참으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가 곧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도에게는 하나님께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 참으로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찬송의 내용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의 마음은 위엣 것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허리를 동인 것입니다. 위엣 것을 향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해 놓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져 오실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편히 잘사는 것은 은혜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을 애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땅의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업, 즉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이는 것은 위엣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에 소망을 두는 것이야 말로 은혜를 아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