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베드로전서 1:14-16  거룩한 자가 되라

 

<본문>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14-16)



<설교>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는 말씀을 하는데, 과연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까?


사람이 자기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이나 육신에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자연히 사욕을 따라 사는 것을 피하겠지만, 정반대로 사욕을 따라 사는 것에 인생의 쾌감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귀찮음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사람이 무엇을 회피하고 무엇을 따라갈지는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욕을 본삼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사욕이란 이전에 알지 못한 때에 좇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할 때에 좇던 사욕을 좇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아는 자로서 새롭게 된 신자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욕은 자기 정욕을 뜻합니다. 육체를 기초로 한 욕망이지요. 이 욕망을 좇는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바라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는 우리의 육체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에 대해 마음이 멀어진다면 그것은 사욕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신자가 믿음을 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믿음을 버리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전에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롭게 알게 된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알게 하였고, 다른 삶에 대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해 알게 하셨고 하늘을 향해 소망을 두게 했습니다. 그러한 신자가 사욕을 좇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천국을 말하되 천국을 부인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욕을 좇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신자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말하는 여러분이 진심으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원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 그대로 살아가면서 천국을 들먹이는 것은 분명 위선이고 위장된 신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을 추구하는 믿음이 있다면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성령에게 다스려지며 하나님께만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품이 있기에 그를 신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상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새롭게 된 신자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라 벗어 버리고 싶은 악한 냄새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거룩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이 이미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욕망에 대해 부자연스럽게 여기고 벗어나야 할 굴레로 여긴다는 것이야 말로 그가 이미 새로운 것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이고, 자기 욕망이 달성되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기에 거룩한 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거룩을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줄 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을 입었다는 것은  신자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께 부름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거룩하라는 말씀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로 사는 것이 곧 자기 사욕을 좇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이 신자라면, 신자인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부르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진 채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종교인의 모습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소망을 세상에 두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은 회피하고자 하는 종교인 말입니다.


신자는 주님이 가져오실 완성된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은 자신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또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설령 시련과 고난이 계속된다고 해도 신자는 자신이 주님에게 붙들려 인도 받고 있는 그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욕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있을 때 힘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마음조차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기면서 시련과 고난에서 나타내고 보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음식 규례가 등장합니다. 부정한 음식과 부정하지 않은 음식을 규정하고 구별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나타날 거룩의 모습이 있습니다. 신자가 나타내고 보여야 할 거룩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신자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신자라고 여기지 마시고 신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입은 자로서 거룩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손을 붙들고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그 나라를 소망함으로서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해가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