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베드로전서 1:17-19  구별된 신자

 

<본문>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7-19)



<설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거룩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거룩을 얻을 자로 불러냄을 받긴 했지만 거룩하게 살 능력은 아예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거룩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거룩에 대한 이해에 따라 나름대로 거룩을 생산하고자 할 것입니다. 대개 보면 거룩을 외적인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옷차림새나 말하는 것에 주의를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노숙자나 걸인들은 거룩과 먼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도 거룩과 거리가 멀었다고 해야 합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의 차림새는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테이프를 들어 보면 목소리 좋은 성우들이 그럴듯하게 녹음해 놓은 것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도 거룩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과연 말에 거룩이 담겨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음성과 말투가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거룩은 외적인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얻어진 은총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왜 거룩에 대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신자는 거룩을 입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불러내신 것은 단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았고, 한번 받은 용서는 취소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결국 용서 받은 자로 천국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잘못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용서를 자기 멋대로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피로 인한 용서를 진심으로 알고 감사한다면 ‘어떻게 살아도 용서되겠네?’가 아니라 용서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은 자로 하여금 용서의 은총을 증거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거룩해지라고 말씀하면 ‘거룩하게 살면 복받는가?’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14절에서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욕을 본 삼는 것, 즉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은혜를 알지 못했을 때 좇던 본성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은 사욕을 본 삼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유익을 추구하고 소망하면서 참된 소망이 되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거룩이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심으로 우리의 주로 자리하신다면 어떤 시련에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소망으로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이고 그러한 거룩을 증거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있다면 시련에 처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는 시련을 겪는 신자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시련을 겪고 있는 신자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이 인간적이겠습니까? 위로가 되고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든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든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서신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만 말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그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잠간이나마 그 마음에 힘을 주려는 의도로 이 서신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 속에서도 신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함으로써 신자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쓰는 것입니다.


시련에서의 참된 위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시련이 비록 고통이긴 하지만 시련에 담긴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됨으로써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다만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는 이런 사람이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련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을 입은 신자로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며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시련이 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신자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신자를 연단하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환경과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만 내 열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환경과 형편에 의해 달라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님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사도는 외모와 행위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외모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행위도 외모에 속한 것이 아닙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이 행위니까요.


하지만 사도는 행위를 우리의 행동, 즉 실천의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의 중심을 붙들고 있는 믿음에 의한 행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시련 속에서도 나를 구속하신 보배로운 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세상에서 떠날 자로 사는 것이고, 사욕을 본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세상과 구별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우리의 실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은, 시련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소망하는 행위를 믿음으로 여기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말로 들을 때는 내가 마치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은 자로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말해도 시련이 오면 육신의 괴로움으로 인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육신의 문제로 고민할 때 영혼의 문제로 고민하는 이것이 구별된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