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베드로전서 1:20-25  피차 사랑하라

 



<본문>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0-25)



<설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성경에 등장하는 분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를 하려고 하고, 사도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시련과 고초를 이해해주는 식이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말씀 밖에서 말씀과 상관이 없는 자로서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신자들의 고난과 그 심정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당하신 그 저주와 죽음이 곧 우리의 것이었으며,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의 고난과 고초 역시 우리의 것임을 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시련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기고 이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단지 베드로 사도가 쓴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전부일 뿐, 시련에서 맛볼 수 있는 은혜와 복음의 능력은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를 지금 세상에서 이미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면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때 가져올 은혜는 지금 이미 현재에 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주어질 구원의 은혜가 지금이미 우리를 붙들어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있게 한 것이라면, 신자는 지금 이미 은혜와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현재는 고난과 시련만 있는 세월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길로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은혜 안에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시면서 장차 주어질 은혜의 부요함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다가 은혜의 부요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사도들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쁨을 누렸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어떻게 찬송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고난에서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오심으로 완전히 드러날 은혜의 부요함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 속에 이미 주어져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시련이 고생이 아니라 장차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고 소망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장차 예수님이 가져오실 은혜의 부요함을 소망하며 사는 신자에게서는 무엇이 보여지겠습니까? 사도는 그것을 22절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왜 갑자기 형제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시련을 겪는 신자들에게 피차 사랑하라고 할 때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형편은 누가 낫다고 할 것 없이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시련을 겪는 상황에서 더 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처럼 같은 형편에서 피차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어려운 형제에게 재물로 도와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복음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케 하라’는 것은 21절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진리를 순종하는 것이고 영혼이 깨끗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22절의 말씀은 참된 형제 사랑은 믿음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이나 윤리에서 나오는 사랑은 어려운 자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육신에 도움이 될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형제 사랑은 육신의 처지나 형편을 보지 않습니다. 물론 형편에 대해서는 아예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의 형편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22-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합니다.


육체를 풀과 같은 것으로 보는 신자가 육체의 형편을 도와줌으로써 그를 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체는 풀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세토록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형제와 함께 영원한 것을 나누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시련 속에 있는 신자에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도록 서로가 도우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향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런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돕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지만 복음 안에서의 사랑은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형제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있게 한 구속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신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같은 소망과 같은 믿음 안에서 피차 사랑하는 것은 자연히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를 사랑으로 이끌어 갑니다. 나의 구원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오실 구원의 은혜를 함께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 안에서 나눌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