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베드로전서 2:1-3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본문>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베드로전서 2:1-3)



<설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여긴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마음도 없으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로 인정은 하되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라고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고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으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의 말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듭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마음에 드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들으면서 내 마음에 들고, 기분 좋은 말이면 서슴없이 아멘하면서 자신의 속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설교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멘’이라는 반응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전하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리의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진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하나하나에 마음이 끌리고 그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소망 두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된 마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소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임을 아는 것이 새롭게 된 마음인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인자는 아무나 맛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롭게 됨으로써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그 마음이 주의 인자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에 속해있던 우리의 실상이고, 그런 우리가 주의 인자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음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보지 못한 신기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어떤 신기한 일도 죄에 속함으로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일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의 인자하심에 대해 시큰둥합니다. 신자는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자신의 이런 반응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않아야 합니다. 주의 인자가 크신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주의 인자에 대해 시큰둥한 것에 대해 애통함과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를 바라보는 신자의 옳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독이나, 궤휼, 외식, 시기, 비방 등은 옛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새롭게 된 마음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새로운 마음에서는 피차 사랑하는 것만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가 세세토록 영원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로 위로하고 감사하는 자로서 피차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오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신자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세세토록 있는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은 말씀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 하여금 악독을 버리게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의 말을 버리게 하는 것이 곧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세토록 있는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갓난아이들처럼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갓난아이들이 젖을 사모하는 것은, 배고픔으로 인한 본능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말씀을 사모하는 것도 말씀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지 계획되고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를 맛본 사람이라면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신자가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자기 기분 따라 살아가는데 주의 인자를 맛본 신자는 자기 기분이 아니라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


씀에 이끌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기에 말씀에 의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서는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 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그러한 것을 버리고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들이 나타날 때, 그것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볼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니 구원을 받기 위해 신앙이 날마다 자라가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함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구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장차 구원을 얻기 위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을 얻었고, 구원 안에 있는 것이 신자라면, 신자의 삶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오직 주의 인자를 바라보고 영생을 향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신자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분명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든 주님만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