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베드로전서 2:4-8  거룩한 제사장

 

<본문>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2:4-8)



<설교>

여러분은 여러분께 쓸모없는 것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아마 모두 버릴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은 무척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인가 필요 없는 것인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께 과연 없으면 안되는 귀한 분으로 존재합니까 아니면 쓸모없는 분으로 존재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받으셨던 대우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은 돌입니다. 건축자들의 용도에 전혀 맞지 않은 돌이어서 버려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결국 세상은 보배를 보배로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보배로운 산 돌을 쓸모없는 돌로 취급하고 버려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돌인데, 왜 세상이 볼 때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대속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보배로운 산 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대속물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죄 용서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자신들을 세상에 우뚝 세워줄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의 용도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영웅도 힘있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 용서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영육의 구원을 말하면서 죄용서와 함께 육신의 복을 위해서도 오신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천국을 위한 용도로서의 예수님과 세상에서 복을 받고 괜찮게 살기 위한 용도로서의 예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직 죄 용서를 위해 십자가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환영할 수 없는 예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


신자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죄 용서만 생각한다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 받고 의인으로 여김 받는 신자는 영광스런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죄인 됨을 인식한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무기력에 빠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고 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입혀 주신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면서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즉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평가 기준으로 자신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은 너희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평가할 때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소유하였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신자의 가치는 그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만큼 세상의 것이 풍족하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기준으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화려한 예배당 건물보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지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로 모이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전혀 반대로 흘러갑니다. 가난한 신자 열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부자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을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분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신자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버려버렸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이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미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높임 받고자 원하는 욕망이 살아있다는 것은, 입술로만 나그네라고 말할 뿐 나그네로 사는 것은 포기한 것입니다.


신자는 신령한 집입니다. 성전입니다. 때문에 성전인 신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전이라면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신령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신자 가운데 제사장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신자 모두가 9절에서 말한 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두가 동일한 영광 아래 있고, 똑같은 지체로서 동일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평신도라고 일컫는 신자든 모두가 동일한 주님의 영광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신령한 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를 드리지 않은 제사장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는 무엇입니까? 신령한 제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특별한 행동이나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 자신이 죽은 자임을 깨닫고, 주님 가신 길만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발견하고 주님 은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제사를 드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생명을 공급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 있는 신자는 성경을 보든 기도를 하든 모든 것은 예수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며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생명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예수님은 보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6,7절을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쓸모없는 돌이지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신자에게 주님은 보배로운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