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베드로전서 2:11-12  사랑하는 자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2:11-12)



<설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신자를 특별한 존재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신자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9절)으로 말하면서 세상에 속한 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신자임을 증거합니다.


또한 10절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하면서, 애초에 백성 아닌 자가 백성이 되고 긍휼을 얻지 못한 자가 긍휼을 얻게 되었음을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은 것이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신자라고 일컫는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에 대해 별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은총을 입게 된 감사가 우리의 속에 살아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왜 기쁨이 없을까요? 그것은 관심을 땅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고, 땅의 것을 소유함으로 삶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기쁨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11절도 보면 신자를 가리켜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되지만,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라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도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관계에 의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의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아’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라는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처지가 나그네와 행인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환경적으로 나아진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더 나빠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처지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다’라는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땅에서 주어지는 환경이나 형편을 가지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자신의 환경을 좋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땅에서 잘되고 편안하게 살고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 때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데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을 때, 결국 믿음에도 흥미를 잃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에 대한 것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단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며 욥의 신앙을 칭찬합니다. 그러자 사단은 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 라며 하나님의 말에 대해 반발을 합니다.


결국 사단의 사고방식은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치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욥의 신앙이 손에 주어진 재물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난 받게 되는 욥의 처지가 세상이 볼 때는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떠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치 않은 욥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욥을 믿으신 것이 아니라 욥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을 믿으신 것이고, 욥의 믿음을 세상에 증거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린 이런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고통과 시련에서 살게 하신 그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나그네와 행인같이 땅에서 보잘 것 없고 내 놓을 것 없는 초라한 삶을 살게 놔두시는지 그 높으신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 중에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말하는데, 과연 신자가 이방인 중에서 가져야 할 선한 행실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형편에서도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게 하심으로써 천국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소망하는 천국 때문에 낙심도 원망도 하지 않고 변함없이 날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련으로 밀어 넣으시고 시련에서도 천국을 소망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간섭하시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곧 하나님의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약속의 나라인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이 신자로서의 삶을 방해합니다. 항상 땅의 것으로 걱정하고 불평하게 하고 남보다 더나은 삶을 추구하게 하면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에 대해 감사함을 잃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모습으로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로 세우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러한 의지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야 말로 구원의 확실함이며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은총인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 남겨 두심으로써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날 주어진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 것은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고 긍휼을 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신자로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