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베드로전서 2:18-25  사환들아

 

<본문>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18-25)



<설교>

지난 시간에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복하고 왕과 방백에 대해서도 그리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의 제도가 우리의 생각에 옳기 때문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리하고 손해를 주는 제도라고 해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불합리한 제도라 할지라도 세상 제도에 순복함으로써 신자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환은 종을 뜻합니다.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자신을 괴롭히는 악한 주인을 만나게 되면 비록 겉으로는 순복한다고 해도 그 속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순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종의 입장에 있는 신자에게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복할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 즉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에게도 그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사도의 이러한 말 역시, 종의 입장에 있는 신자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에게 순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이 나그네로 부르신 신자로 하여금 나그네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나그네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나그네의 삶을 방해 받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부자 청년에게 근심이 되어 결국 예수님에게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자,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좇지 못하도록 붙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재물이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영생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다가 영생을 하나 더 보태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영생은 무엇입니까? 부자 청년처럼 자신이 소유한 많은 것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영생에 대한 이러한 가치관이 나그네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버리지 못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부름을 입었지만 내 욕심으로 인해 나그네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나그네의 길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지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의 개입이나 간섭을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이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은 백이면 백 거짓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상식이라고 해봐야 결국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일 뿐인데, 성경 어디에 인간의 욕망을 성취해 주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까?


거의 모든 교회가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이것이 성경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입니까? 성경에 의해 주장되는 것이라면,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러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현대인들에게 성경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보여주는 도구로 삼을 뿐, 실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나그네로 부르신 자기 백성을 나그네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자기 백성을 핍박으로 밀어 넣으시고 유리하는 자가 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일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미련두지 않게 하시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또 소유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세상을 나그네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오히려 그것이 선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나그네로 살도록 도와주시는 일이 내게 있는 것을 빼앗고, 나로 하여금 유리하게 하시고, 종으로 살게 하시는 결과로 남는다고 해도 선한 하나님의 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을 벌고 잘사는 것을 세상은 복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선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결코 좋은 것도 선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그네의 삶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감사하면서 더욱 주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종으로 살게 되고 소유한 것이 없이 힘든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나그네로 살도록 도우신 결과임을 깨닫고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얼마든지 순복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으로 살게 되는 것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삶으로 인도하신 선한 일의 결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신자에게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부르신 자기 백성을 나그네로 살게 하시기 위해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여러분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낙심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육신은 고달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나그네로 하여금 나그네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1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자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이러한 선하심을 알기에 신자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