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베드로전서 2:21-25  돌아온 자

 

<본문>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21-25) 



<설교>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주어지지 않고 원치 않은 전혀 다른 세계로 끌려 갈 때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세계를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계로 우리를 끌어가십니다.


그것을 21절의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분명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마음으로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반발하고 거부하고 싶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은 우리의 계획에는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계획은 세상에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많은 것을 누리며 행복이라고 이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에는 우리의 꿈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삶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나의 꿈도 계획도 모두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셨습니까?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본문 구절로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22-24절에서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신 자취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남기신 이 자취에 우리의 마음에 맞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욕을 받았으면 두 배 세배로 되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들이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면 그를 위협해서라도 막고자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들의 속성과는 전혀 반대로 욕을 받으시고,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친히 온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자취입니다. 그리고 그 자취를 따라가는 자로 부름을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세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매 맞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나와는 상관이 없기를 바랍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단 것은 받고 쓴 것을 받지 않겠다는 심보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덕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게 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을 계속해서 세상에 증거 할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으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다는 것은, 죄는 행하지 않고 의만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기뻐하고 죄를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를 기뻐하고 소망하는 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를 이러한 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해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 더 이상 죄에 속한 자가 아니고 의에 속한 자가 된 것이며, 이 모두가 말할 수 없는 은혜며 기쁨임을 아는 신자라면 예수님이 가신 자취를 마다할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세계를 꺼려하고 자신의 욕망이 살아 춤추는 자신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를 의에 대해 산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분이 이끌어 가시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처럼 약자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놓여 진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목자이시고 감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되면,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의인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아니할 때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자신의 힘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소원을 앞세워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끌어 가는 신앙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의 공로가 전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로와 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으로 맺어지는 신앙생활을 거부하고 인간의 종교적 욕망으로 맺어지는 종교생활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한 자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내용들은 거부하고 싶은 것투성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만 해도 거부하고 싶은 내용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가 고치도록 허용하신다면, 십자가와 연관된 모든 내용들을 다 뜯어 고쳐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수시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불만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 원함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겠지만, 이미 악한 존재로서 나를 위한 욕망으로 똘똘 뭉쳐 살아가는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음성을 알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음성을 들을 자는 자기의 죄 됨을 보는 자입니다. 그럴 때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로 의에 속한 자로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내안에서 강처럼 흘러넘칠 때 주님이 가신 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자로 만들기 위해 일하십니다. 자기 세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세계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