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베드로전서 3:1-6  아내된 자

 

<본문>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3:1-6)

 

  

<설교>

성경은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착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아니하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멸망의 존재로 판단되어질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가되는 인간은, 피조물이며 말씀을 벗어난 죄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왜 그렇게만 봐야 하는가?’라는 불만을 보이기도 하지만, 피조물로 죄인으로 보지 않으면 어떻게 봐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있어야 좋게 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하나님 앞에 잘 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까지 죽인 인간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면, 인간이 꿈꾸는 소망이라는 것, 목적, 목표라는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1-7절은 아내와 남편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부부에 대한 얘기인데, 사람이 결혼을 하는 이유, 목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다기보다는 자기 행복이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결혼을 해서도 행복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말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즉 아내된 자들이 꿈꾸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 된 자들이 꿈꾸는 행복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즉 남편의 사랑만을 구할 뿐 남편에게 순복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이러한 말은 맞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남편에 대한 순복은 단순히 남편의 말을 들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6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남편을 주인으로  여기는 정도의 순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 아내의 역할을 순순히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현대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여자에게만 불리하고 공평치 못한 내용으로 여겨지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이미 공평치 못한 말씀을 2장에서 대한 바가 있습니다. 사도는 신자에게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제도가 나에게 유리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리하고 공평치 못한 제도에도 순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공평치 못한 말씀입니까?


또한 나를 핍박하는 왕과 방백이라고 해도 순복해야 하고, 종이 악한 주인에게도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과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과 기쁨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1절을 보면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종이 악한 주인에게도 순복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도 남편에게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속 안 썩이고, 돈 잘 벌어 오는 남편에게만 순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못 마땅한 남편에게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혹 도를 순종치 않는 남편이라고 해도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보면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남편이 방해할 때, 남편을 두고 마귀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만 다녀봐 내가 업어 준다’는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갖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도를 순종치 아니한 남편이라고 해도 순복하라고 합니다.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고 잘해주면 남편이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내의 행위가 남편의 구원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내의 행위를 도구로 삼아 남편을 부르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은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로 믿으면서, 주를 위해 살고자 힘쓰고, 살아계신 주님을 두려움으로 대하며 살아갈 때 그 모든 것이 정결한 행위가 되어 도를 순종치 않는 모든 자에게 주님의 도를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세상을 심판의 현장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3절에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는 말을 합니다.


금은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여자에게 있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혹 도를 순종치 않는 남편에게 자신에게는 변변한 옷도 보석도 없다고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보여주고 천국을 보여주는 모습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4절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속사람을 뜻합니다. 즉 날마다 늙어가는 겉사람을 보석과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값진 것으로 치장을 해도 진심으로 아름다운 모습은 속 심령이 온유하고 안정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주어진 모든 삶에서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의 온유와 안정입니다. 이러한 행실에 남편에게 도를 전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는 사라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신을 단장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내된 자들의 아름다움인데, 그 이유는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곧 주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ㄴ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사도는 아내 된 자들을 내세워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 대해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둔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온유한 심령으로 살게 하고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없이 안정된 심령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런 행실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하면서 도를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주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도구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굳이 아내의 위치에 있는 여자에게 하는 말은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에서 말씀으로 살아감으로써 주를 증거해야 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도구임을 믿는다면, 어떤  삶에서도 온유할 수 있고 안정된 심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을 가장 귀히 여기며 살아감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신자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