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베드로전서 3:7  남편된 자

 

<본문>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3:7)



<설교>

신자가 주님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자신의 본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답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주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그 값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께 소유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주님께 속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도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럼 여자만 손해 보는 것 아닌가?라는 반발을 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절)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 역시 육에 대해서는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영원한 말씀에 속한 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살기를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남편 된 자를 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아내 된 자에게 말하는 것이나 남편 된 자에게 말하는 것은  실제 아내의 위치의 있고 남편의 위치에 있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아내 된 자 남편 된 자를 세워서 주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로 사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먼저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합니다. 아내와 동거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합니다. 지식이 무엇이기에 지식을 따라 동고하라고 할까요?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당시 남자들의 지식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남편 된 자들에게 사도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동거라는 말에는 남자에게 종속되고 여자를 다스리는 관계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존재로 함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편도 아내도 동등한 위치에 있지만 남편에게 순복함으로써 주님께 속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돕는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의 위치에서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은 서로를 섬기는 자의 위치에 있게 하셔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남편 된 자가 가져야 할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나그네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그네 인생을 사는 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나그네와 나그네가 함께 만나서 동거하는 것이 부부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나그네와 나그네가 만나 동거하는 것이라면 나그네가 아닌 사람들의 동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 어떤 관계에서도 주님께 속한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약점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설사 생각한다고 해도 나그네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현재의 내 형편과 처지가 나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옛 습성이 신자의 본분을 떠나게 하는 것이고, 주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른 지식을 따라 동거하는 남편이라면, 역시 그 지식을 따라 지체들을 만날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동거하면 서로 돕는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기쁨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자가 바른 지식을 따라 교회로 모이지 아니하면 서로 돕는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왜 동등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며 자신을 세우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동거하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든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아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자를 연약한 그릇으로 말합니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 된 자가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연약하기 때문에 내가 도와야 하고 지켜줘야 할 존재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즉 연약한 여자는 강자가 다스릴 존재가 아니라 도와주고 지켜줘야 할 존재라는 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약자는 지배를 받아야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돕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과 다른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다스리고 다스림 받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를 연약한 자로 바라보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남편을 세워서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지식은 아내를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아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는다는 것은, 차별이 없음을 뜻합니다. 함께 구원 받는 사람이고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은혜에서도 차별이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고 해서 남편보다 못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내는 연약한 자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리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3:8절에서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상을 누가 일을 많이 했는가를 따져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제대로 하였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자는 연약한 자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이 맡은 역할에 대해 시기하지 않게 됩니다. 즉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는 불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른 지식을 따라 기도를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거부하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은 바른 지식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항상 말씀이 선포하는 바른 지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