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베드로전서 3:8-1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본문>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베드로전서 3:8-12)



<설교>

8,9절의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내용을 보면 마치 복을 받는 조건이 이 구절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구도 복을 받을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것은 우리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말하는 내용들은 도무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사도가 ‘너희가 모두 마음을 같이 하여 헌금을 잘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목사를 잘 섬기고, 성경을 한 번씩 기록하고’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면, 우린 분명 ‘예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사도의 말을 자신의 소관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사도의 말에 대해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어줄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말을 우리의 소관으로 받아 들린다면 그 누구도 복을 유업을 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먼저 8,9절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체휼은 ‘처지를 이해하여 가엾게 여김’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의 처지를 예수님이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가야 할 사망의 길을 홀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서 빛으로 나아가는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낮은 자의 자리에 머무시고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자신의 피로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주님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의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증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8,9절의 내용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관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와 괜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나 하게하고 기도하면 병이나 낫게 해주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로 하여금 자신이 힘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실 것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은혜의 모습이 증거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말하는 것도, 사도가 말한 내용을 실천하도록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일하고 계심을 증거 할 도구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것 자체가 이미 복을 유업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살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증거하는 세계를 살아갈 자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10-11절에서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는 말을 합니다.


신자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신자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악한 말을 그칠 수가 있는 것이고, 궤휼을 말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화평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이,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그 소망이 신자를 그러한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악한 말을 그치기를 힘쓰기 이전에, 궤휼을 말하지 않으려고 힘쓰기 이전에, 진심으로 자신이 생명을 사랑하는 자인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살피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지만 주의 낯은 악인을 향하신다고 합니다.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는 것은, 의인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면서 의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주의 낯이 악인을 향하시는 것은 악인이 주의 얼굴을 대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심판을 뜻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인도 받고 있기에 악인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만나는 것은 다른 세계에 속한 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진 자로, 동일한 은혜를 입은 자로 만나는 것이기에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같은 마음에서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 된 관계로 살아갈 뿐이지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하며 비판하는 것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의 말을 통해서 나그네 정신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신자가 함께 모였을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시 흩어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세계에 속한 신자의 모습으로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 내용대로 실천을 잘해서 복을 유업을 받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런 식으로 복을 받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는 신자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습성을 그대로 좇아서는 안될 존재가 신자임을 증거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권고를 대하면서 ‘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나에게 내 믿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주의 은혜가 나를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령이 활동하시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성령이 일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주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주님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로 신자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결국 나오는 것은 세상의 습성뿐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는 습성만 보일 뿐이고, 체휼이나 불쌍히 여김이나 사랑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사랑을 배웠습니까? 긍휼과 자비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을 세워서 하늘의 것을 증거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좋아라고 하늘의 풍성한 복을 입히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역사하시기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이고, 사랑으로 역사하시기 위해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증거될 것이고,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증거되기 마련입니다. 은혜와 사랑이 능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나같은 자를 용서하시고 구원 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