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베드로전서 3:13-17  세상과 신자

 

<본문>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전서 3:13-17)


<설교>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내어 놓으며 살아갈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본래의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증거할 자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내게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한 것들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 받은 하늘의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께는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있음으로 은혜가 증거 되고, 사랑이 있음으로 사랑이 증거 되는 삶을 사는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을까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은 세상이 볼 때도 말할 수 없는 선입니다. 이러한 선을 행하는 자를 세상이 높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13절을 보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나는 행동을 뜻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도 진리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신자가 진리에 순종하고 있을 때, 선한 열매가 맺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신자는 누가 비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을만한 행동은 진리로부터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은, 세상이 기독교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인 것입니다.


가령 진리는 교회를 향해서 번성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번성하는 것을 진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번성을 곧 진리의 뜻으로 여겨버릴 때, 교회의 번성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모든 것들 역시 진리를 등에 없고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번성을 둘러싼 수많은 폐단들이 진리의 뜻이라는 명목아래 자행되는 것이고,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진리를 말하는 기독교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방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진리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고 하고, 악한 주인에게도 순복하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기한 자로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방을 받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자가 진리에만 순종하면 비방을 받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높임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비방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까? 또한 사도들은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이것을 보면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해는 받지 않으나 고난은 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라는 말을 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의의 길을 갈 때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가는 의의 길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지만,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을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에 있는 신자는 그 행실로는 비방을 받지 않으나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착하게 살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세상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세상이 거부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세상 전부의 악함으로 보지 않고 단지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행동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착한 행실을 통해 진리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증거되는 현장에는 인간의 모든 자존감이 파괴되는 현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무너짐을 철저히 맛보게 되고 비로소 예수님이 피흘리고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착한 행실로 가능하겠습니까?


진리가 증거 되는 현장, 의의 길에서는 죄에 대한 폭로가 있기 마련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인간이 꽁꽁 붙들고 있는 모든 의와 착함을 무너뜨리면서 의에 대해 무능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와 도덕으로 인간의 가치와 수준을 평가하는 세상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무너뜨리고 오직 죄악 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 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할 뿐입니다. 이 반발심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진리에 순종하고 의의 길을 간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과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타협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외치고 있는 수준은 불교와 다를 바 없고 유교 천주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 모두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제아무리 수준 높은 도덕적인 삶이라고 해도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악으로 규정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가 고난을 받을 때,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염려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그리스도가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것은, 세상이 물을 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 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에 고난을 부딪칠 때 두려워하기보다는 나를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으로 인해 담대함을 얻게 하시고 주님만을 증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기 때문에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필히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모든 일에서 갖게 되는 갈등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 악을 행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말을 감추어 버리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모든 일에서 두려움이 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온유이며, 자신이 세상과 타협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포기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 두려움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온유와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선한 양심, 즉 선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셨을 때 비록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고 고난을 받았으나 선을 추구하며 산 것이야 말로 옳은 것이었음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신자의 선행을 욕했던 세상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에게는 마지막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를 바라보고 어떤 비방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진리만 좇아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처럼 진리의 길만 좇기를 소원하는 신자에게 고난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17절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신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책임지신 주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떤 일에서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